역사속 오늘

광주 민주화운동 발화

사람들은 1980년을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그해 5월의 봄 햇살도 여느 해처럼 따사로왔다. 그러나 5월 17일 밤,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그해 봄은 더 이상 봄이 아니었다. 1980년의 광주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점에서는 다른 지역과 차이가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 그가 창출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한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에서는 광주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었다. 지역편향적인 경제개발은 호남인의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심화시켰고, 누적된 불만은 호남 출신의 김대중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투사되고 있었다.

그들의 희망은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통해 김대중을 내란혐의로 구속하면서 분노로 변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10시, 전날밤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계엄군이 정문 출입을 통제한 가운데 학생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계엄군 물러가라”를 외쳤다. 곧 계엄군이 학생들을 향해 돌진했고 학생들은 돌을 던졌다. 달아나는 학생들에게 계엄군의 무차별 곤봉 세례가 가해졌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멍에 중의 하나가 된 광주의 비극,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의 서막이었다.

이후 열흘간 광주는 고립된 섬이었다. 사망자들의 시체가 거리에 나뒹굴었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시내를 배회했다. 5월 27일 새벽4시,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도청 건물로 공수부대 특공조가 소리없이 접근했다. 그리고 콩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로 새벽의 밤하늘이 어지러웠다. 항전하던 지도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작전은 1시간 30분만에 끝났다. 10일간의 ‘화려한 휴가’도 막을 내렸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