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한응 주영 서리공사, 영국에서 음독 자결

이한응(1874~1905)이 관립 육영공원에서 2년간 공부한 후 초대 영국․이탈리아 공사 민영돈을 따라 영국 땅을 밟은 것은 1901년이었다. 런던 트래보비어로(路) 4번지에 있는 공관에서 이한응의 직함은 영․이탈리아 주차 공사관 3등 참사관이었다. 그러다가 국제 정세의 급변으로 민영돈 공사가 1904년 초 귀국하자 서리공사로 대영 교섭을 책임졌다. 이한응은 1904년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 한반도 정세 분석에 관한 10페이지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영국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주목해 줄 것과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가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약소국의 대표였고 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후 ‘상호간의 승인없이 제3국과 이 조약에 위배되는 조약을 맺을 수 없다’고 명시된 한일의정서가 강제 조인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관계는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이한응은 포기하지 않고 약소국의 1인 공관장으로 고독한 투쟁을 전개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영국 외무성에 글을 써 보내거나 면담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거절 뿐이었다.

러일전쟁의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일본은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재정과 외교를 사실상 빼앗는 이른바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나라는 허울 뿐이었다. 이한응의 외교 활동도 일제에 모두 노출된 데다 본국과 연결해 줄 외교 파트너도 없었다. 더구나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는 유럽의 우리 공사들을 즉각 소환하도록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영국 외무성에도 “이한응은 미친 사람”이라는 중상을 서슴지 않았다.

어느덧 공관은 ‘고도(孤島)’가 되었고, 이한응은 그 고도에서 울분을 삭혔다. 약소국 외교관의 무력감과 굴욕, 여기에 절망까지 더해져 이한응이 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1905년 4월부터 시름시름 앓던 이한응은 4월 18일 조국의 동포와 부인 등 가족 앞으로 유서를 써놓고는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리고 5월 12일 음독 자결함으로써 약소국의 비애를 죽음으로 항변했다. ‘…아 나라는 장차 폐허가 되고 민족은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산들 그 욕됨이 자심할지니 한시바삐 죽어서 잊음만 같지 못하리라….’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 첫 순국자는 이렇게 목숨을 끊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