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사북탄광 사태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전국이 열병을 앓고 있던 1980년 4월 초,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 소재한 국내 최대의 민영광산 동원탄좌에도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노조 지부장이 노조원들 몰래 회사 측과 20%의 임금인상에 합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광산노조는 임금 42.75% 인상을 요구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부장은 부정선거로 당선돼 재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광산노조의 느슨한 감독과 회사 측의 비호에 기대어 재선거를 1년이나 미루며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기대에 한참 못미친 임금인상 합의 소문이 떠돌았고, 소문도 곧 사실로 드러났다.

당시 광부들의 생존 환경은 최악이었다. 저임금에 집단수용소나 다름없는 사택촌, 작업환경도 늘 광부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매년 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0여 명이 부상했다. 다치지 않으면 진폐증이 광부들을 괴롭혔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가닥 기대를 걸었던 임금인상마저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광부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지부장과 면담하려 한 광부 대표들이 경찰에 끌려가자 4월 17일부터 노조원들이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다가 4월 21일 오후 5시쯤, 농성을 유혈폭동으로 비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나 도망치던 경찰이 지프로 노조원 4명을 친 것이다. 죽지는 않았지만 “동료 광부가 경찰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탄광촌에 퍼졌다. 흥분한 광부들이 사북읍내로 진출, 사북지서와 광업소 사무실을 부수고 경찰서장과 광업소장 등에 몰매를 가했다. 흥분한 일부 시위대는 노조 지부장의 처를 붙잡아 옷을 벗겨 끌고 다니며 린치를 가했다.

4월 22일 무장경찰 수백명이 사북읍으로 진입했으나 돌과 갱목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5000명 시위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철수했다. 경찰관 1명이 숨지고 경찰·광부 16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사북은 노동자들 세상이었다. 4월 24일, 광부·정부 대표가 밤샘협상 끝에 노조 집행부 사퇴, 상여금 인상 등 11개항의 협상안을 타결지음으로써 최악의 순간은 피할 수 있었다. 사태수습 후 계엄사는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으로 처리하는 등 모두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1970년대 화려한 경제성장을 위해 억눌려온 노동자들의 설움과 분노의 집단적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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