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주기철 목사 감옥에서 순교

1938년, 한국 종교계가 질곡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조여오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부쩍 강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이미 1936년 5월에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를 참배하고 있었고, 같은 해에 안식교도 신사참배를 시작했다.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까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외로이 신사참배를 거부해온 장로교 평북노회마저 1938년 2월에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러나 숭실학교·숭의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들만은 스스로 폐교(1938년 3월)까지 감수하며 저항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와중에 1938년 8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가 두번째로 투옥된다. 곧 밝혀지지만 일제의 치밀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부산·마산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주 목사가 평양으로 부임한 것은 1936년 7월. 평소 교회를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거듭 밝혀온 데다 과거에도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주도한 전력이 있는 그를 경찰이 주시했다.

1938년 9월 9일, 주 목사가 투옥된 틈을 타 한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친일 목사들에 의해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회의를 지켜보던 교인들이 곳곳에서 흐느꼈다. “나는 하나님께 상소하오”라고 외친 교인은 경찰에 끌려갔다. 일제는 회유와 협박, 심지어는 고문까지 자행하며 주 목사의 의지를 꺾어보려 했으나 주 목사는 완강했다. 마침내 일제는 산정현교회를 폐쇄시키고 1940년 9월 네번째로 그를 투옥시켰다. 그리고는 목사직까지 박탈했다. 1944년 4월 21일 밤9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예감한 주 목사는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죽음을 앞둔 마지막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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