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6·25전쟁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북진(北進) 명령

20세기 중엽의 아시아 역사는 맥아더와 함께 쓰여졌다. 그는 일본의 2000년 가까운 역사에서 유일한 외국인 통치자였고, 3년에 걸친 한국의 미군정 또한 그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다. 태평양전쟁 동안에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그가 아시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 필리핀의 군사고문으로 부임하면서였다. 이는 능숙한 언론 플레이와 독특한 패션으로 인기를 끌어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부상한 맥아더를 내치려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림수였다. 그냥 내치면 여론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우려한 루스벨트가 ‘적수를 명예롭게 유배시키는’ 전술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도발로 맥아더는 기사회생했고 6·25는 70세 노 장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맥아더는 6·25를 정치적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1943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패배해 대통령의 꿈을 접은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트루먼이었다. 맥아더가 사단장이었을 때 일개 소위에 불과했던 트루먼은 한국전 발발 전부터 맥아더를 경원시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부터 꺼려했으나 그 해는 미국의 중간선거가 있는 해여서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노장군과 다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상치않은 중국의 참전과 1·4후퇴를 고비로 전황이 급변하면서 내연하던 둘의 갈등이 폭발하고 말았다. 맥아더는 공산주의 중국과의 대대적인 한판을 꿈꾸며 확전을 원했다. 그가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주장하며 26개의 원폭을 요구했으나 3차대전을 우려한 트루먼은 맥아더의 위험한 도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맥아더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51년 3월 24일 북진(北進)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 중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전히 미국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미국 국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맥아더는 4월19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은퇴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