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세월이 가면’ 시인 박인환 사망

1956년 3월 어느날, 송지영, 김규동 등의 문인들이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거나해질 즈음 시인 박인환이 즉석에서 휴지에 쓴 한 편의 시를 동석한 작곡가 이진섭에게 건넸다. 작곡가는 단숨에 그린 악보를 옆자리의 나애심에게 전달하며 노래를 청했고, 나애심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했다. 곧 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 새로이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정식으로 노래를 부르자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앞으로 몰려들었다.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을 노래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인환은 ‘명동의 백작(伯爵)’으로 불렸던 당대의 멋쟁이였다.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게다가 한껏 멋을 부려 명동을 찾을 때면 명동은 언제나 그를 반겼다. 박인환은 다방 ‘동방싸롱’에서 혹은 유명무명의 술집에서 술과 낭만 그리고 문우들과 어울리며 현실의 고통을 시와 술로 삭였다.

책과의 인연도 남달랐다. 책을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서가였고, 해방 후에는 2년 간 파고다공원 근처에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마리서사는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본거지였다. 박인환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을 찾는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1946년 ‘거리’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또 이곳에서 부인도 만나 결혼했다. 그가 숨진 곳도 지금의 교보문고 후문쯤에 있었으니 죽어서까지 책과의 인연을 이어간 셈이다.

박인환을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 평론가는 많치 않지만 몇몇 작품이 음악적 효과에 힘입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박인환의 이름은 조용필 만큼이나 친숙하다. 박인환이 “답답해, 생명수(약)를 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심장마비로 요절한 것은 1956년 3월 20일, 30세 때였다. 이상(李箱)을 기린다며 사흘 간 쉬지않고 술을 마신 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다. 지인들은 그가 평소 좋아했던 조니워커 술과 카멜 담배를 시신과 함께 망우리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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