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삼성전자, 애니콜과 갤럭시S 출시

휴대폰 2000여대를 불태운 것은 절대 방심하지말라는 극약 처방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 ‘품질 확보’라고 쓰인 머리띠를 두른 2000여 명의 직원 얼굴에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직원들 앞에는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운동장 한복판에는 수만 대의 휴대폰이 쌓여 있었다. 이윽고 10여 명 직원들의 해머질로 제품들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망가진 제품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이른바 ‘불량제품 화형식’이었다. 화형식은 1993년 질(質) 경영을 강조하며 의식 개혁과 변화를 주문한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방침에 어긋나면 제품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극약 처방이었다.

휴대폰 2000여 대가량을 설 선물로 임직원에게 나눠준 게 발단이었다. “통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임직원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급기야 이 사실이 이건희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곧 500억 원어치나 되는 제품들에 리콜 조치가 내려져 당시 삼성전자 총이익(9500억 원)의 5.3%나 되는 비용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불길은 구습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퍼포먼스였다.

삼성전자가 아날로그 휴대폰 ‘SH-100’을 내놓으며 휴대폰 시장에 뛰어든 것은 1988년 9월이었다. 하지만 그해 7월 휴대폰 서비스를 시작한 국내시장은 모토로라 등 외국 업체 세상이었다. 삼성전자는 국내업체 중에서도 후발주자였다. 첫해 시장점유율은 10%의 저조한 실적에 그쳤다.

삼성은 모토로라를 국내시장에서 퇴출할 야심작으로 1993년 10월 ‘SH-700’을 출시했다. 국산 제품으로는 첫 100g대의 휴대폰이었다. 산이 많은 한국 지형에 적합하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직원들은 배낭에 휴대폰을 가득 담아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등산객들이 제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소위 ‘체험 마케팅’을 시도했다. 이런 노력 덕에 시장점유율은 높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삼성 브랜드로는 모토로라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삼성은 새로운 브랜드 전략을 구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94년 10월에 출시된 ‘애니콜’(SH-770)이다.

SH-770은 통화 품질을 끌어올리고 소형 경량화에 성공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구호를 내건 마케팅도 주효했다. 당시 삼성의 시장점유율은 52.5%의 모토로라에 비해 25.8%에 불과했다. 그러나 애니콜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1994년 말 점유율을 30%까지 끌어올렸다. 1995년 8월에는 마침내 51.5%를 기록, 42.1%의 모토로라를 누르고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이로써 모토로라의 10년 아성은 무너졌다. 불량제품 화형식은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있었던 방심하지 말라는 경고성 이벤트였다.

 

당시 애니콜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세계인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브랜드

애니콜은 1996년 4월 1일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디지털 휴대폰 시장에서도 175g의 초경량, 초슬림형 단말기 ‘SCH-100’을 출시해 국내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우리나라 수출 역사상 새로운 획을 그은 ‘애니콜 신화’가 시작된 것도 1996년이었다. 그해 9월, CDMA 방식의 PCS 단말기 170만 대(6억 달러 규모)를 3년간 미국에 수출하기로 미 스프린트 스펙트럼사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OEM 방식이 아닌 엄연히 ‘스프린트․삼성’이라는 브랜드 수출이었다.

삼성전자는 1997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50만 대를 팔아 미국 시장점유율 4위를 차지했다. 1999년에는 세계 CDMA 휴대폰 시장에서 40%의 점유율을 기록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삼성이 미국형 CDMA 방식보다 시장 규모가 훨씬 큰 유럽형 GSM 방식의 단말기 시장을 공략하는 데 사용한 무기는 1997년 2월에 출시한 ‘SGH-200’이었다. 후속 모델인 ‘SGH-600’은 9개월 만에 200만 대 수출, 전체 판매 대수 960만 대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삼성은 고급 브랜드 전략에서도 성공했다. 저가 정책을 최대 무기로 삼아온 한국 제품이 고가전략으로 정면 승부를 걸어 성공했다는 것은 한국의 수출사에서 기념비적인 일이다. 삼성제품은 성능과 디자인에서도 뛰어났다. 휴대폰에 각종 기능을 합친 것도 삼성전자가 처음이었다. 1999년 8월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 기능이 들어간 휴대폰을 출시하고 2000년 7월 역시 세계 최초로 카메라폰을 선보였다. 이후에도 멀티미디어 기능을 휴대폰에 접목한 ‘컨버전스’ 제품으로 전 세계 소비자들을 사로잡으며 ‘메이드 인 코리아’의 위상을 높여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세계인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휴대폰도 애니콜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브랜드도 애니콜이었다. 삼성은 2006년 판매 대수 1억 1800만 대, 매출액 150억 달러로 세계 3위에 랭크되었다. 2007년에는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모토로라를 제치고 핀란드의 노키아에 이어 2위를 질주했다. 모토로라는 2009년 LG전자에도 뒤처져 4위로 밀려났다. 이후 북미 시장 부동의 1위와 2위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차지했다.

 

2012년 1분기부터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부동의 1위

2007년 6월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했다. 이후 휴대폰은 소형 컴퓨터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과 전화·문자 메시지 정도만 가능한 일반 휴대폰(피처폰)으로 나뉘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절대 강자는 애플의 아이폰이었다. 삼성은 스마트폰 대응에 실패해 한동안 고전했으나 갤럭시S 시리즈가 자리를 잡으면서 2011년 10월 마침내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에서도 1위 자리에 올라섰다. 2012년 1분기에는 1998년부터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노키아마저 피처폰을 포함한 전체 순위에서 2위로 밀어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세계 정상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애플의 아이폰과 사활을 건 싸움의 연속이었다. 삼성전자는 피처폰 위주의 휴대폰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아이폰과 혈투를 벌이며 규모를 키우고 품질을 높여나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2007년 6월 29일이었다. 아이폰은 이전까지 노키아와 삼성전자, 그리고 LG전자 등이 나눠 먹던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특히 애니콜 신화로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던 삼성전자에는 큰 충격이었다.

스마트폰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9년이었다. 캐나다의 통신기기 제조업체 ‘리서치인모션(RIM)’이 개발한 ‘블랙베리’였다. PDA 기술에 음성통화 기능을 갖춘 블랙베리는 미국과 캐나다 등 주로 북미에서 비즈니스맨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블랙베리는 프로그램 설치와 삭제가 가능하고 무선네트워크 환경을 통해 이메일까지 주고받을 수 있어 오늘날의 스마트폰 정의에 부합하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머지않아 찻잔 속의 태풍으로 전락했다. 아이디어는 멋졌으나 다소 복잡한 인터페이스와 느린 속도가 원인이었다. IT업계의 공룡 마이크로소프트(MS)도 스마트폰에 뛰어들었다. MS는 PDA용 운영체제인 윈도 모바일을 다듬어서 스마트폰용으로 특화했다.

삼성도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삼성전자는 아직 스마트폰 개념이 생소하던 2002년 9월 국내시장에 처음으로 스마트폰 M330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팜(Palm), 운영체제(OS), CPU가 탑재된 바(Bar) 타입의 모델이었다. 이후에도 매년 1~2개의 스마트폰 기종을 내놓으며 미래에 대비했다. 2006년 말에는 OS 윈도 모바일 5.0을 탑재한 ‘블랙잭’을 미국 시장에 출시해 블랙베리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인터넷 검색과 이메일 송수신 등이 가능하고 문자 배열이 PC 키보드와 같은 자판이 탑재되었다.

 

갤럭시S 시리즈는 스마트폰 시장의 판도 뒤집은 카운터펀치

애플의 아이폰이 나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2007년 6월 29일 아이폰을 출시하며 “전화기를 재창조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구매 열기는 미 전역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과는 전문가들은 물론 애플 자체도 믿지 못할 만큼 대성공이었다. 아이폰 덕분에 애플은 MS와 IBM을 뛰어넘는 세계 최대 IT기업으로 등극했다.

삼성전자는 아이폰의 기세에 눌려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져있다가 2008년 11월 ‘옴니아’를 대항마로 내놓았다. 이후에도 윈도 모바일 OS를 채택한 옴니아2와 옴니아7을 2009년 11월과 2010년 10월 각각 출시했다. 2010년 5월에는 결국 실패로 확인된 윈도 모바일 OS를 포기하고 삼성전자가 독자 개발한 OS ‘바다’를 탑재한 ‘웨이브’를 출시했다. 이번에도 결과는 참담했다. 옴니아와 웨이브는 하드웨어는 우수했으나 아이폰의 소프트웨어 파워를 이겨내지 못했다. 옴니아가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자 시장에서는 “삼성 휴대폰도 끝났다”는 종말론이 오르내렸다. 삼성 내부에서도 제2의 소니가 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하지만 삼성은 소니와 달랐다. 반전의 계기는 아이폰4 출시에 맞춰 2010년 6월 25일 내놓은 ‘갤럭시S’였다. 갤럭시S는 초고속 중앙처리장치, 4인치 슈퍼아몰레드 터치스크린, 다원화된 앱스토어 등으로 무장했다. 무엇보다 옴니아에서 지적받았던 OS와 애플리케이션 부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구글의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했다.

기대반 우려반이던 갤럭시S는 출시 4개월 만에 500만 대 이상 팔리고 7개월 만에 1000만 대 판매를 돌파했다. 갤럭시 열풍은 곧바로 시장점유율로 반영되었다. 2011년 1분기만 해도 삼성전자의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4%였다. 하지만 갤럭시S가 나온 직후인 3분기에는 9.3%로 늘어났다.

 

삼성전자의 최대 고민은 자체 스마트폰 OS가 없다는 것

갤럭시S가 아이폰 추격의 발판을 놓았다면 갤럭시S2(2011.4 출시), 갤럭시S3(2012.7), 갤럭시S4(2013.4), 갤럭시S5(2014.3)는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 카운터펀치였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안드로이드폰 운영체제를 쓰는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은 하드웨어라는 기존의 장점에 성능이 뛰어난 소프트웨어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잘 나가는 삼성전자에도 고민은 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 애플이 iOS,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폰이라는 자체 스마트폰 OS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세계 1위 스마트폰 생산업체인데도 자체 OS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고민이다. 이것은 구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언젠가는 구글에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장기적으로는 삼성의 성장과 생존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다. 2014년 1분기 기준 세계 스마트폰 OS 점유율은 안드로이드가 80.9%, iOS가 15.3%, 윈도폰이 3.1%이었다.

삼성전자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2012년 1월 인텔, NTT도코모 등 세계적인 기업 12개사와 함께 ‘타이젠’이라는 OS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지 않았다. 구글의 간접적인 압력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타이젠 제품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시장의 예측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전자는 2014년 8월 타이젠을 탑재한 스마트폰을 출시하지 못했다. 사정이 무엇이든 삼성전자가 장기적으로 성장하려면 자체 OS 개발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