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는 장면
동아시아 최고 금속공예품 찬사 쏟아져
충남 부여 능산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모조리 도굴당한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사적 14호)이 있다. 고분군을 찾는 관람객이 증가하자 충남 부여군이 주차장을 확장해 관람객의 편의를 돕고자 했다. 주차장은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사적 58호) 사이 작은 계곡에 있는 계단식 논을 닦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주차장 부지에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나 유물은 없는지 사전에 시굴조사를 해야 한다. 부지가 계단식 논이고 이 때문에 항상 물이 질척거리다 보니 누구도 그곳에 유구나 유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92년 12월의 시굴조사에서 건물 터와 불탄 흔적, 금속 유물 파편들이 발견되었어도 전문가들은 단지 금속 제품을 만드는 공방 건물 터 정도로 추정했다. 주차장 공사를 중단시키려면 더 결정적인 유구·유물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결국 발굴 허가 기간이 다 지나가는데도 이렇다 할 발굴 성과가 없어 유적지가 조만간 불도저에 밀려날 판이었다.
1993년 12월 12일 발굴단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파보기로 했다. 계속되는 겨울 추위와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발굴 현장은 여전히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발굴단은 120㎝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파들어갔다. 어둑해질 무렵, 서쪽 발굴현장 땅속 50㎝쯤에서 목곽수조가 발견되어 발굴단을 긴장시켰다. 경험상 습지유적은 공기가 통하지 않아 유물이 있다면 보존상태가 아주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덩이 속에는 기와·토기편들이 진흙과 뒤엉켜 있었고, 그 사이로 금속편까지 빼꼼 드러났다. 발굴단이 꽃삽으로 조심스럽게 물체를 노출시키는데 곧 날이 어두워졌다.
발굴단은 도굴 등을 우려해 인부들을 모두 귀가 조치하고 남아있는 조사원이 달려들어 물구덩이 속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파들어갔다. 그렇게 4시간여가 지난 8시 30분쯤 누구랄 것도 없이 발굴단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20세기 백제 발굴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백제금동대향로가 1300년 만에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물속에 오래 잠겨 있었던 덕분에 녹도 슬지 않았다.
발굴단은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된 금동대향로를 박물관으로 가져가 면봉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하나하나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얼굴에 발굴단은 넋을 잃었다. 높이 61.8㎝, 무게 11.85㎏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향로의 뚜껑 정상에는 봉황 모양의 새가 있었다. 봉황 아래 뚜껑에는 고대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실감나게 돋을새김되었다. 완함 연주자를 중심으로 피리 모양의 종적, 관악기 배소, 북, 거문고를 연주 중이다. 그 아래엔 저마다 새가 앉아 있는 5개의 봉우리가 서 있다. 악사와 이 봉우리들 뒤편에 각 5개씩 10개의 향 연기 구멍이 숨었고, 2개는 봉황 가슴에 있다. 한 마리의 용이 용틀임하며 막 피어나는 듯한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물고 있는 형상에 쏟아진 동아시아 최고의 금속공예품이라는 찬사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나당 연합군의 절 유린과 함께 백제의 혼 담은 대향로도 깊이 잠들어
12월 22일 부여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할 때 이름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였다. 하지만 곧 전문가들 사이에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96년 5월 문화재위원회가 국보 제287호로 지정하면서 명칭을 ‘백제금동대향로’로 공식 발표했다. 타원형 물구덩이는 추가 발굴을 통해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을 주도한 부여박물관 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추정했다. 서기 600년 무렵 창졸간에 나당 연합군의 약탈 유린이 시작되었을 때 스님들은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추었다.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그저 며칠만 숨겨두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에 황급히 향로를 공방 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은 허망하게 멸망했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했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 터 지붕도 무너졌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깊이 잠들었다.
그곳이 절터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해 준 것은 4차 발굴이 끝나가던 1995년 10월, 향로 출토지인 공방터 인근 목탑터에서 발굴단이 목탑의 기둥(心柱)이 넘어진 지점의 지하를 110㎝쯤 파내려가다가 발견한 화강암으로 된 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이었다. 높이 74㎝, 가로 세로 각각 50㎝ 크기의 사리감에는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라는 문장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20자의 명문을 해석하면 ‘백제 창왕 13년에 매형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뜻이다. 창은 백제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이름이고 창왕 13년은 서기 567년이다. 위덕왕은 554년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전투에서 신라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 패사한 백제 중흥의 영주 성왕의 아들이며 매형 공주는 성왕의 딸이다. 이에 따라 창왕 13년(567년) 창왕의 누이인 매형 공주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리감도 목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견되어 그때까지 공방으로 추정하던 건물 터가 사실은 백제 왕실의 명복을 비는 사찰 터였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