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미군, 베트남전에서 밀라이 학살 자행

1968년 3월 16일 아침, 미 제11보병여단 소속 찰리 중대원 60~70명이 9대의 헬리콥터로 월남 쾅가이성(城) 밀라이 마을에 착륙했을 때, 주민들은 여느 때처럼 아침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미군이 마을을 수색했으나 적군은 보이지 않았고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 뿐이었다. 곧 소대장 캘리 중위의 명령에 따라 주민들이 한곳에 모였다. 주민들은 살기등등한 병사들의 눈빛을 보고는 “노! 노!”하며 애원했지만 이미 병사들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가 있었다.

중대원들은 최근 4개월 동안 병력의 3분의 1이 베트콩과의 전투로 살해되거나 부상한 터여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다. 이윽고 무장 병사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고, 주민들이 피를 흘리며 곳곳에 쓰러졌다. 4시간에 걸친 광란의 학살극이었다. 헬리콥터 조종사가 이 사실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나서야 학살은 중단되었지만 이미 5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뒤였다. 상급부대는 “민간인 20명이 우발적으로 희생된” 성공적인 작전으로 사건을 은폐했다.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듬해 3월 학살현장에 있던 병사에게서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한 제대 군인이 워싱턴에 편지를 보내고, 이 사실을 눈치챈 세이무어 허시 기자가 11월 17일자 뉴욕타임스에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였다. 은폐되었던 사건의 진상이 의회와 국방부 조사에 의해 서서히 사실로 드러나자 미 국민은 충격에 휩싸였다.

지휘라인에 있던 14명이 기소되었으나 캘리 중위만 재판에 회부되었다. 캘리는 미 군법회의에서 부녀자와 노인 등 22명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노동형 선고를 받았으나 복역 사흘째날 닉슨 대통령의 석방명령으로 풀려났다. 미국인들은 이 사실에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닉슨의 조치를 찬성했다. 캘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캘리 혼자서 죄를 뒤집어 쓴 걸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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