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 날이 밝았다. 이승만 정권은 4년전 선거 때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고, 2년 전 총선 때 서울에서 참패한 전철을 밟지않기 위해 선거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선거 1년 전 내무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보답이라도 하듯 도지사, 시장, 경찰서장 등으로부터 미리 사표를 받아 적극적인 선거개입을 강요했다. 거액의 융자금을 빌려준 대기업으로부터는 막대한 선거자금을 챙겼다.

선거를 한달 앞둔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관심은 대통령보다 누가 부통령이 되는가로 쏠렸다. 이 대통령이 85세로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부통령은 사실상 준 대통령 자리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기를 바랬지만 현직인 장면 부통령이 너무 강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선택은 부정선거 뿐이었다. 선거 당일 새벽에 40%나 되는 찬성표를 투표함에 미리 투입해 놓았고, 투표소 안팎으로 무장경찰과 완장부대를 배치해 유권자들에게 위압감을 느끼도록 했다. 또 유권자를 3·5·9명씩 조를 짜 조장이 조원들의 기표를 확인한 뒤 투표함에 넣도록 했고 투표함과 투표용지도 바꿔치기 했다. 개표결과 이승만 963만표(89%) 이기붕 833만표(77%) 장면 184만표로 발표됐다. 부정선거의 극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잇따르면서 역사의 물줄기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마산이 심해 오후 6시부터 마산시청 앞에서 시작한 시위가 그날 밤 11시경에야 강제해산됐지만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시체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분노의 함성이 전국으로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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