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한글타자기 개척자 공병우 박사 사망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는 자서전 제목처럼 공병우(1906~1995) 박사는 90평생을 고집과 신념으로 살다간 고집쟁이요 독불장군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21세기 사람이 20세기에 살아야 했던 고충’이었는지 모른다. 공병우는 독학과 강습소 교육만으로 1926년 조선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해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가 되었다. 1936년 나고야제국대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하고 1938년 9월 한국인 최초로 공안과 의원을 개설했다.

그가 한글의 중요성과 우수성을 깨닫게 된 것은 1938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으로부터 “한글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가르침을 받고서였다. 해방 후 일본어 의학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한글타자기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자 곧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한글타자기 개발에 매달렸다. 당시는 한글을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게 하는 한글타자기 뿐이었다. 그러나 5벌식인 탓에 손으로 쓰는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공병우는 한글타자기와 영문타자기를 한 대씩 사와 타자기 구조를 연구했다. 6개월 간의 시행착오 끝에 1949년 마침내 한글 기계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국내최초의 고성능 한글타자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글이 가로로 찍히는 세벌식 타자기였다. 그해 11월 미국 특허를 받기위해 설계도와 함께 2대의 시제품을 미국 언더우드사에 보냈고 1950년 초 언더우드사가 한글타자기 1대를 보내왔다. 한국 최초로 미국 특허를 받아낸 타자기였다.

타자기는 6․25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그를 붙잡아 육군 병원에 배속시켜 타자기를 개발하도록 한 것이다. 공병우 타자기는 1953년 7월 휴전 때도, 1965년 6월 한일 수교 때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될 때도 조약 조문을 작성하는데 사용되었다. 1968년 상공부가 비과학적인 한글타자기 네벌식 표준자판시안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자 정부를 상대로 한 공병우의 고집스러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세벌식이 아니면 한글기계화는 망한다”는 신념 때문에 그는 중앙정보부에까지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힘들고 고독한 싸움이었지만 ‘공병우식’ 삶이 걸어야 했던 운명이었다.

1995년 3월 7일 그가 숨진 사실도 “내 죽음을 한달 후에 알리라”는 유언 때문에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알려졌다.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되었다. ‘공수래공수거’ 삶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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