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 ‘난 알아요’ 발표

↑ 서태지와 아이들

일약 신세대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당대를 풍미해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사회 분위기에 눌려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던 1980년대의 대중문화가 1990년대를 맞아 활짝 만개한 데는 서태지의 역할이 크다. 1992년 3월 23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음반 ‘난 알아요’가 발매되고 그 후 20일도 지나지 않아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난 알아요’가 방송 전파를 탄 것은 기존 대중가요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전주곡이었다. 이후 서태지는 일약 신세대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1990년대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20살의 서태지(1972~ ), 20대 초반의 양현석(1969~ )과 이주노(1967~ )가 한 팀을 이룬 ‘서태지와 아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 4월 11일 방송된 MBC-TV의 ‘특종 TV연예’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특종 TV연예’는 신인 가수들을 등장시켜 전문가의 평을 듣는 코너를 신설했는데 첫 방송에 가장 먼저 등장한 신인가수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그 날 출연한 전문 패널리스트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이렇게 평했다. 작곡가 하광훈은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가 약하다”고 했고 작사가 양인자는 “노랫말도 새로웠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진행자 이상벽은 “섬세한 노래가 격렬한 동작에 묻혔다”고 평했으며 가수 전영록은 “평가는 시청자의 몫”이라며 직접적인 평을 피했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7.8점.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렇게 데뷔했다.

전문 패널의 평가와 달리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방송 후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은 빠른 랩, 격렬하면서 유연한 춤동작, 직설적인 가사에 열광하고 환호했다. 이후 1집에 수록된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는 모든 방송 프로그램의 정상을 휩쓸었다. 앨범은 발매 3주 만에 30만 장, 두 달 새 100만 장이 팔려나갔다. 각종 가요차트에서도 17주 연속 정상을 석권해 대한민국 가요 사상 초유의 폭풍을 몰고 왔고 트로트와 발라드 위주이던 가요계의 질서를 마구 흔들어 놓았다.

본명이 정현철인 서태지는 중학교 2학년 때이던 1985년 말, 친구 4명과 록밴드 ‘하늘벽’을 결성했다. 서울 북공고 1학년이던 1987년에는 학교를 자퇴하고 언더 록그룹 ‘활화산’의 멤버로 활동했다. 1988년 라이브 카페 우드스탁 무대에 섰다가 그의 연주를 지켜본 신대철의 권유로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4기 멤버가 되고 1990년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양현석은 가수 박남정의 백댄서 등으로, 이주노는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활동하던 전문 춤꾼이었다. 양현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시나위 활동을 마친 서태지가 솔로 앨범을 준비하다 춤을 배우고 싶다고 날 찾아왔다. 당시 난 힙합 문화, 흑인 문화에 심취해 있던 상황이라 긴 머리에 뿔테 안경을 끼고, 랩과는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외모의 서태지에게 약간의 괴리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팀을 꾸려보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이후 이주노를 영입했고 팀을 꾸린 지 5개월 만에 데뷔했다.”(조선일보 2012년 3월 16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 ‘난 알아요’(1992.3.23)

 

기존 대중가요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전주곡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할 무렵의 젊은 세대는 식민지와 전쟁과 독재의 상처를 간직하지 않은 첫 세대로 자기 표현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탈이념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문화적으로 ‘새것’에 목말라했다. 경제적 풍요 덕에 사고는 자유로웠고 갓 피어난 디지털 문화의 시각적 자극에 익숙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과거 어느 또래 집단보다 많은 용돈과 소비 성향을 가졌으나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이 거대한 10대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수년 만에 문화 시장의 최대 소비자로 등장시켰다.

1집 ‘난 알아요’가 180만 장이나 팔리며 청소년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는 했으나 1집만을 국한하면 ‘난 알아요’는 댄스노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댄스가수였다. 랩이라는 새로운 스타일로 치장을 했다고는 해도 양현석과 이주노가 백댄서로 춤을 추고 서태지 역시 함께 춤을 추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그들은 댄스가수였다.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며 내공을 다진 로커 서태지가 댄스곡으로 데뷔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중적 성공을 위해 로커로서의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데뷔 5개월 후인 1992년 8월 16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공연은 그들의 위상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400여 명의 여학생이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공연장 주변에서 밤을 새운 이날의 공연에는 1만 2000여 명의 10대 팬이 몰려들어 환호하고 열광했다.

서태지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2집(1993.6) ‘하여가’에서였다. 서태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메탈과 힙합, 국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하여가’로 다시 한 번 가요계를 평정했다. 서태지가 마침내 로커의 모습을 만천하에 알린 것은 3집 앨범 ‘발해를 꿈꾸며’(1994.8) 때였다. 앨범에 수록된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를 통해 그때까지 적당히 감춰온 록의 기질을 송두리째 드러낸 것이다.

헤비메탈과 강렬한 랩, 통일을 향한 열망과 획일적 교육에 대한 비판을 담은 가사, 탁월한 편곡으로 3집 노래 역시 방송 차트 1위를 점령했다. 3집의 성공은 이슈메이커로서의 본격적인 시발점이기도 했다. 4집 앨범 ‘컴 백 홈’(1995.10)에서는 미국에서도 논란이 된 ‘갱스터 랩’을 선보여 음악적 실험을 이어나갔다.

1집부터 4집까지 시류에 맞춰 민첩하게 변신하면서도 음악의 진보를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은 덕에 4장의 음반은 모두 600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서태지가 새로운 음반을 발매할 때마다 들고나온 무기는 랩댄스(1집), 메탈과 국악(2집), 얼터너티브 록(3집), 갱스터 랩(4집) 등 언제나 지배적인 음악 형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진보적인 문화평론가들로부터 ‘추상적’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음악에는 뚜렷한 사회적 인식도 담겨 있었다. 통일을 소재로 한 ‘발해를 꿈꾸며’(3집),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비판한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4집) 등이 대표적이다.

 

철저히 계산하고 포장할 줄 아는 ‘마케팅의 귀재’

서태지는 연예인 초상권 문제를 공론화하고 가수의 주체적인 활동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매니지먼트사와 결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1집 활동을 마친 뒤 2집 ‘하여가’ 앨범이 나오기까지 6개월간 모습을 감춘 것 역시 기존의 가요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험이었다. 가수가 눈에서 사라지면 인기가 떨어지므로 끊임없이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오랜 관념을 무시하고 가요계에 처음으로 이미지메이킹 차원의 ‘휴식기’라는 개념을 도입한 그의 실험은 이후 우리 가요계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서태지 성공의 이면에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추구한 서태지의 음악적 감성이 토대를 이루고 있지만 철저히 계산하고 포장할 줄 아는 ‘마케팅의 귀재’ 서태지의 재능도 크게 작용했다. 서태지는 마케팅과 스타시스템의 생리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표절 시비, 결혼설, 공연윤리위와의 충돌, 악마주의 논란 등 돌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사건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자신에게 붙들어매는 데 능란했다.

그는 팬들이 식상할 때쯤 팬들의 시야에서 잠시 사라지는 영악함까지 보였다. 1996년 1월 31일 “새장에 갇힌 새는 똑같은 노래만 부른다”는 말을 남기고 전격적으로 팀 해체와 은퇴를 선언한 후 미국으로 잠적한 것이다. 1998년 7월 7일 발매된 컴백 앨범 ‘서태지’는 가수 서태지가 국내에 없는데도 출시 첫날 100만 장 이상이 팔려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한국의 역대 최고 히트 상품’을 발표하며 서태지의 음반을 당당히 1위에 올려 서태지의 음악적 성취를 인정해 주었으나 서태지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우리 가요계에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서태지의 등장 후 TV 방송은 댄스 없이 오직 음악만을 들려주고 싶어하는 전통적인 가수들을 퇴출시켜 음악의 다양성을 실종시켰고, ‘서태지 열풍’을 확인한 대형 기획사들은 아이돌 댄스그룹을 경쟁적으로 양산해 대중에게 음악의 편식을 강요했다.

2000년 8월 29일 은둔 4년 7개월 만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 그의 귀환을 3000여 명의 팬들이 환호하며 맞자 이후 서태지는 신비화 전략을 통해 스스로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들어 팬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이후 ‘서태지 컴퍼니’를 설립(2001.3)하고 7집 앨범 ‘이슈’(2004.1), 8집 앨범 ‘아토모스‘(2009.7)를 발매한 뒤 한동안 휴식기를 보내다가 2014년 가을 9집 앨범을 발표했다.

양현석은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기획사를 설립해 가수 및 음반 기획자의 길을 걸어 지금은 국내 유수의 YG엔터테인먼트 CEO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10월에는 YG를 코스닥에 상장해 단숨에 1,000억 원대 주식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주노는 1996년 댄스그룹 ‘영턱스클럽’을 데뷔시켜 프로듀서로 가장 먼저 성공했지만 이후에는 활동이 뜸하다가 지금은 사실상 활동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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