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국내 인터넷 시대 개막과 전길남

국내 최초 인터넷 연결은 1990년 6월 1일 이뤄져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는 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전자계산학과를 네트워크로 연결한 ‘SDN’ 전산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대의 PDP11 중형컴퓨터와 전자기술연구소의 VAX 11/780 중형컴퓨터가 1200bps 속도의 전용회선으로 연결된 SDN이 등장하기 전, 은행 온라인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네트워크는 대형 메인컴퓨터와 더미 터미널(데이터 처리능력 없이 데이터 입출력 기능만 지닌 단말기) 간의 연결이었기 때문에 각기 독립된 역할을 하는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SDN도 컴퓨터와 컴퓨터의 연결이었기 때문에 네트워크와 네트워크의 연결을 의미하는 인터넷 시대의 개막을 운운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했다. 다만 훗날 모든 인터넷이 사용하게 되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TCP/IP(통신 프로토콜)를 사용해 두 기관을 연결했다는 점에서 인터넷 맹아로서의 가치는 있다.

SDN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인터넷의 대부’로 불리는 전길남(1943~ )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오사카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UCLA대에서 시스템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 유학생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나라 대안교육과 대안문화운동의 대모로 활동한 전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이다.

전길남은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다 1979년 2월 해외 과학자 유치 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땅에 터를 잡았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 둥지를 튼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컴퓨터 개발이었다. 그러나 전길남은 NASA에서 우주선을 연결하는 통신을 연구한 경험이 있어 네트워크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 결과물이 SDN 개통이었다.

1982년 9월 전길남이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SDN의 중심 무대는 자연스럽게 KAIST로 넘어갔다. 그때 만난 석․박사 과정의 제자들이 훗날 우리나라 인터넷과 컴퓨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박현제, 허진호, 정철, 송재경 등이다. ‘전길남 사단’으로 불렸던 이들은 “전길남 박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인터넷 발전은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1983년 1월 KAIST까지 SDN망에 연결되어 SDN은 어엿한 통신망의 구색을 갖추었다. 하지만 미 국방부가 주도한 세계 최초의 인터넷 ‘ARPANET’은 물론 미국의 다른 네트워크와도 연결되지 않아 아직은 국내를 무대로 한 네트워크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아시아 최초로 구축한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자부심이 컸다.

SDN은 점차 해외 컴퓨터와 연결을 추진했다. 1983년 8월 UNIX의 내장 프로토콜인 UUCP로 네덜란드 네트워크를 경유해 유럽의 유닉스망인 ‘EUNET’에 연결하는 데 성공, 첫 해외망 접속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EUNET에는 유럽·미국 등 30개국이 가입되어 있어 SDN은 자연스럽게 미국과도 연결되었다. 곧이어 그해 10월 미국의 HP연구소와 연결하는 데 성공, 1200bps 전화선으로 유럽․미국과 전자우편을 교환했다. 설치비가 별도로 들지 않는다는 이점 때문에 UUCP는 한동안 국내 노드(네트워크의 분기점이나 단말장치의 접속점) 확산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최초 메시지는 ‘The Network connection was set up this morning’

UUCP를 이용한 미국 네트워크와의 첫 접촉은 1984년 12월 미국 ‘CSNET’(ARPANET에 가입하지 못한 대학, 연구소, 기업들 간의 네트워크)과의 연결이었다. SDN 구성원들은 이 CSNET을 이용해 구미 각국과 정보를 교환했으나 아직은 초보적인 전자우편이나 뉴스 서비스 정도에 그쳤다. 미국의 ARPANET은 군사용 네트워크인 MILNET과 연구용인 ARPANET으로 분리된 뒤에도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 등 일부 국가에만 문호를 개방했을 뿐 다른 나라에는 연결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SDN은 1986년 7월 미국의 인터넷 관리기구인 NIC으로부터 최초의 IP 주소(128.134.0.0)를 할당받았다. 이후 8개 호스트(KAIST, KIET 등)를 NIC에 가입케 하고 ‘kr’ 도메인을 등록함으로써 미국과도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의 네트워크와 연결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89년이었다. 미국의 하와이대를 중심으로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태평양 지역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PACCOM망’에 가입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KAIST, 한국통신, 포항공대, ETRI 등 11개 기관을 중심으로 ‘하나망(HANANET)’을 구축, PACCOM망과 연결을 시도했다. 그 결과가 TCP/IP를 이용해 이뤄진 KAIST와 하와이대 컴퓨터 간의 첫 연결이었다. 당시 하와이대는 미국과 외국의 네트워크를 이어주는 관문 역할을 했다.

KAIST의 중형컴퓨터 ‘설악’은 청량리전화국과 금산지구국을 거쳐 태평양 상공의 미 인공위성을 통해 하와이대와 56Kbps 전용선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1990년 3월 24일 KAIST의 전길남 연구실에서 ‘오늘 아침 네트워크 연결이 이뤄졌다(The Network connection was set up this morning)’는 첫 메시지를 하와이대로 전송했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보낸 최초의 이메일이었다.

한국의 인터넷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인터넷 연결은 1990년 6월 1일 이뤄졌다. 전길남 교수가 KAIST에서 워크스테이션급의 컴퓨터 ‘썬스팍1’을 켜는 순간 하나망의 KAIST와 PACCOM망의 하와이대 간에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흘렀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인터넷과 직접 연결되는 순간이자 한국의 인터넷이 비로소 국제 사회에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하나망이 미국의 ‘NSFNET’(미국의 교육기관을 서로 연결한 네트워크)과 접속하는 데 성공,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인터넷 이용은 학계․연구기관의 연구정보 교류와 교육용으로만 한정되어 있어 일반인이 인터넷의 혜택을 누리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1994년은 인터넷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원년이었다. 1994년 6월 20일 한국통신이 일반인을 상대로 ‘코넷(KORNET)’을 상용 서비스한 데 이어 데이콤 인터넷(10월)과 아이네트․나우콤의 ‘나우누리’(11월)가 인터넷 시장에 뛰어들면서 인터넷 대중화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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