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대만 근대사에서 최대비극으로 기록된 ‘2·28사건’

2차대전이 끝나고 패전국 일본이 대만을 중국에 반환했지만, 국·공내전에 경황이 없던 장개석은 대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천이를 대만성 행정장관으로 파견했으나 행정과 치안은 여전히 공백상태였고 대륙 출신에 대한 대만인들의 반감은 더욱 높아만 갔다. 쌀값이 폭등하고 공무원 사이에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거들먹거리는 외성인(내륙 출신) 군인의 횡포 등으로 대만사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던 1947년 2월 28일, 흥분한 5000여 명의 군중이 대만 타이베이 시내의 전매청으로 쳐들어갔다. 전날 밤 밀수담배를 팔던 40대의 한 여인이 정부 단속반과 실랑이하던 중 부상을 당하자 이를 항의하는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한 데 따른 분노의 표시였다. 폭도로 돌변한 군중은 살인자 처벌을 요구하며 관공서와 경찰을 습격하고 방송국을 점령했다. 당국도 무차별 발포를 감행,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3월 7일 대만의 유력인사들이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사항을 행정장관에게 제출했으나 정부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까오슝, 신주, 타이난 등 대도시는 물론 농촌 지역으로까지 사태가 확산되자 3월 8일 국민당군 21사단 8000여 명이 소요진압을 위해 대만에 상륙했다. 이튿날부터 섬 전체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다. 사건은 1주일 만에 진압되었으나 중국 근대사에서 동족 간 최대비극의 하나로 기록된 이 ‘2·28사건’으로 대만인이 입은 상처는 너무 컸다. 사망자가 5000명, 3만명, 심지어 10만 명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쉬쉬해오던 사건이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38년 만에 계엄령이 해제되고 대만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였다. 봇물터지듯 연구논문과 소설 출간이 잇따랐고, 사건을 소재로 한 허우샤오셴(候孝賢)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는 198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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