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과 동구권 수교

7·7 선언은 ‘북방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이른바 ‘북방외교’는 2차대전 후 시작된 냉전기로 인해 그동안 우리가 수교할 수 없었던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구권과의 국교 수립을 말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북방외교의 주체적 요인이었다면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한국의 민주화는 객관적 토대였다.

1988년 2월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이 추구한 북방외교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외교 영역의 확대다. 그전까지 우리 외교는 미국, 일본, 서구 그리고 일부 중립국가만을 상대 했다. 유엔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외교 추구는 전방위 외교 시대로 나가겠다는 구상이었다. 둘째는 경제 영역의 확대였고 셋째는 평화와 안보의 담보였다. 이는 북한과 소련·중국 간의 동맹관계를 약화시킴으로써 소련·중국의 대북 군사원조를 차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1988년 2월의 취임사에서 중국․소련 등 공산 국가와의 수교를 통해 대 북한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는 북방정책을 최우선 외교 과제로 천명했다. 7월 7일에는 이를 구체화한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해 지난 40여 년 간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해온 공산권과의 갈등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분명히 했다.

정식 명칭이 ‘민족 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인 7·7 선언은 ‘북방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남북동포 간의 상호 교류 적극 추진 및 해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한 왕래 ▲이산가족 간 생사․주소 확인, 서신 왕래, 상호 방문 등 적극 주선·지원 ▲남북간 문호 및 교역 개방 ▲우방과 북한 간 비군사적 교류 불반대 ▲남북 간 대결 외교 지양 ▲북한과 미·일 간 관계개선 협조 및 소련·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추구 등을 담은 7·7 선언은 그동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만 한정된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7·7선언은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북한을 포위·압박함으로써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나오도록 해, 남북통일의 초석이라고 평가되는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의 성과를 이끌어냈다.

 

서울올림픽 개최는 북방정책을 현실화할 절호의 기회

1988년 9월 개막한 서울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의 갈등구도를 완화하는 데 더없이 좋은 무대였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냉전시대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전환점이었으며 서울올림픽 개최는 북방정책을 현실화할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드라이브를 건 개방과 개혁, 이것이 몰고온 동서 간 해빙 무드도 북방외교의 성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노 대통령의 북방외교정책 추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과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역할이 컸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외교·안보 사항은 김 수석이 관장했다. 그는 북방정책의 종합참모로 북방외교의 큰 그림을 그렸다. 박 보좌관은 특사나 비밀 접촉을 해야 하는 비공식적인 일들을 담당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 성사의 첫 상대국으로 삼은 나라는 헝가리였다. 동구권 국가 중 처음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결정하고, 오래전부터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수교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1988년 5월 헝가리의 실권자로 등장한 그로스 서기장이 대외관계에 전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겠다고 역설한 것도 우리를 고무시켰다. 노 대통령은 비밀리에 박철언 보좌관을 헝가리로 보내 우리의 뜻을 전달했다. 그로스 서기장은 1988년 8월 헝가리의 국립은행 총재를 특사로 보내는 것으로 화답했다.

양국은 관계개선을 위한 첫 단계로 1988년 9월 13일 대사급의 전 단계인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1988년 10월 2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우리 상주대표부가 개설되고 12월 5일 헝가리 상주대표부 대사가 서울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1989년 2월 1일에는 마침내 대사급의 공식 외교관계까지 수립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41년 만에 비로소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와 처음으로 수교하는 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서방․비동맹 국가 일변도의 외교에서 탈피해 전방위 외교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북방외교 성사의 첫 상대국은 헝가리

공식적인 수교 절차는 1989년 2월 1일 최호중 외무장관과 방한 중인 헝가리 외무차관이 서울에서 수교합의 의정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합의에 따라 이날부로 서울과 부다페스트의 상주대표부는 대사관으로 격상되었다. 한국․헝가리 수교가 불러올 파장을 잘 알고 있는 북한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당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주변 국가와의 교차 접근에 대해서도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기 위한 음모”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방외교는 헝가리에 이어 동구권 두 번째로 폴란드(1989.11.1)와 대사급 수교를 맺고, 유고슬라비아(1989.12.28)와도 정식 수교함으로써 한층 탄력을 받았고 사실상 순항의 길로 들어섰다. 헝가리와의 수교가 대 공산권 외교의 돌파구이자 교두보였다면 폴란드와의 수교는 북방외교가 마침내 정상궤도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공식 선언이었다.

물꼬가 트인 동구권과의 수교는 체코슬로바키아(1990.3.22), 불가리아(1990.3.23), 루마니아(1990.3.30), 알바니아(1991.8.26) 등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먼저 신호를 보내고 또 경협자금으로 6억 5000만 달러(헝가리)와 4억 5000만 달러(폴란드)를 제공하면서 수교를 추진한 헝가리․폴란드와는 달리 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 등과의 수교는 이들 국가가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점에서 북방외교의 완벽한 승리였다. 1~2년 뒤 북방외교의 종착점이라 할 소련(1990.9.30), 중국(1992.8.24)과도 수교함으로써 북한과의 관계 개선만이 마지막 과제로 남게 되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