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적십자회담이 시작된 후 13년 만에 이뤄진 첫 남북 고향 방문단 성사
1985년 9월 21일 오전 10시 20분, 부모와 자식, 형제와 오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하며 흘린 눈물이 평양의 고려호텔을 적셨다. 분단 4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20명의 이산가족이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 통한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로 이산가족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마음을 터놓고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남쪽의 동생이 “여러분과 하나님의 덕분”이라고 하면, 북쪽의 형은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님 덕분”이라고 대답하는 등 남북간 이질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분위기가 잠시 굳어지는 듯 했으나 40년 만에 만난 형제는 이내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37년 만에 누이동생을 만난 지학순 주교도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누이동생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동생이 안내원의 눈치를 살피면서 “북한에서는 모두가 잘 먹고 근심 없이 잘살아. 이곳이 천당인데, 오빠는 천당을 어디서 찾겠다는 것이야”, “오빠가 속아 살았어”라고 말할 때 오빠의 마음은 아리고 아팠다. 당초 남북 양측은 평양에서 30명의 이산가족을 상봉하게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측이 당초 합의를 깨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20명 만이 상봉의 감격을 누렸다.
비슷한 시각, 서울의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도 북한에서 온 15명의 이산가족이 남쪽의 가족과 친지를 얼싸안고 40년 단절의 세월을 원망하며 울었다. 서울에서도 당초 약속은 30가족이 만날 예정이었으나 상봉 전 북한적십자 측에서 일방적으로 합의를 깨 15가족만이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남북한 고향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15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역사적인 북행길에 오른 것은 상봉 하루 전인 9월 20일이었다. 김상협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인솔하는 우리 측 평양 방문단은 오전 9시 30분 판문점 분계선을 넘어 1시 30분 평양에 도착,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같은 숫자로 구성된 북측의 서울 방문단 역시 반대 코스를 거쳐 쉐라톤 워커힐에 짐을 풀었다.
1차 상봉이 있던 9월 21일 오후 3시, 서울예술공연단이 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김정구, 김희갑, 백남봉, 남보원, 나훈아 등이 선보인 모두 18가지의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것은 소프라노 이규도의 ‘그리운 금강산’과 부채춤이었다. 하춘화가 ‘서울의 찬가’를 불렀을 때는 박수는커녕 장내 분위기가 험악해지기까지 했다. 북한 예술단도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공연했다.
한과 설움 참지 못하고 통한의 눈물 흘려
이튿날인 9월 22일 남북 이산가족은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15가족이 추가로 재회했을 뿐 다른 가족에게는 상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평양으로 올라갔거나 서울로 내려온 이산가족 중 15명(평양)과 20명(서울)은 가족과 재회하지 못하고 다시 쓰라린 가슴을 안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했다.
일요일이었던 9월 22일 평양에서는 개신교 예배와 가톨릭 미사가 거행되어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동토에 찬송과 기도 소리가 메아리쳤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친 양측 대표단은 9월 23일 정오 무렵 각각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올라가고 남으로 내려왔다.
이산가족 상봉은 1984년 남한에 대규모 수해가 나고 북한이 수해 지원 제의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84년 10월 북측이 수해 복구 지원을 논의하기 위해 남쪽으로 왔을 때 우리 측이 이산가족 방문과 상봉 등을 논의하자며 적십자회담 재개를 북측에 요청했다. 그래서 마련된 자리가 1985년 5월 27일부터 서울에서 열린 적십자회담 제8차 본회담이었다.
회담 마지막날인 5월 30일, 양측은 광복절을 전후로 한 시기에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에 극적으로 합의해 전 국민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7월 15일부터 시작된 실무 접촉에서 대표단 규모, 이산가족 방문자, 예술단 공연 내용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했다. 북측은 이산가족보다는 예술단 규모를 늘리려 했다. 이산가족 방문지도 서울과 평양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반면 우리는 이산가족이 예술단원보다 많아야 하며 이산가족이 고향이나 고향의 도청 소재지를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결국 당초 방문단 교환 예정일을 1주일 넘긴 8월 22일에야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50명, 예술 공연단 50명, 취재단 30명, 지원인력 20명, 단장 1명 등 151명 규모의 방문단을 9월 20~23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1972년 8월 30일 제1차 적십자회담이 시작된 이후 13년 만에 이뤄진 첫 남북 고향 방문단 성사였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사
남북 분단 이래 이산가족 교류는 크게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한 갈래는 남북 정부 간 또는 적십자사 간의 접촉을 통한 공식 교류였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승인 하에 북한이나 제3국에서의 상봉 등 민간 차원의 비공식 교류였다. 남북한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공식 접촉을 시작한 것은 1971년 8월이었다.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가 제안한 ‘1000만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측이 수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사 간 직통전화가 개통되고 8월 30일 제1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면서 이산가족 찾기 움직임은 급물살을 탔다. 이후 1973년 7월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에 걸쳐 적십자회담이 진행되었으나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북한이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구실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이후 10여 년간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중 1984년 여름, 남한에 수해가 나고 북한이 수재물자 지원을 제안하면서 다시 해빙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9월 남북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데 성공, 남북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북측의 무성의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러다가 1989년 11월 ‘제2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실현을 위한 남북 적십자 실무대표 제6차 접촉에서 남북은 각 571명의 이산가족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북측의 무리한 ‘혁명가극’ 공연 요구로 무산되었다. 남북은 1991년 12월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채택한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산가족 재회 관련 조항을 포함시켰다.
두 번째 이산가족 상봉 2000년에 이뤄져
1992년 9월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는 이산가족 해결 방안을 구체화하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송환을 조건으로 판문점 면회소 설치와 고향 방문 정례화를 합의하는 단계로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기부 관계자의 훈령 조작 사건이 발생, 역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인모는 그래도 북으로 보내졌다.
1998년 4월과 1999년 6월 중국 북경의 차관급 회담에서도 비료 지원 문제와 함께 생사 주소 확인 및 상봉 면회소 설치 문제 등이 논의되었으나 1999년 6월에 일어난 연평해전으로 성사가 좌절되었다. 그러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간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결정되었고 2000년 8월 15일, 마침내 100명씩의 혈육이 서울과 평양에서 만났다.
이 같은 공식 교류와 달리 비공식 교류는 다양한 채널로 이뤄졌다. 1964년 10월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북한의 신금단 여자 육상선수가 일본에서 아버지와 눈물로 상봉했고, 1990년 3월 한필성․필화 남매가 일본 삿포로 동계아시아경기를 계기로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1990년 10월에는 경평 축구전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회택 축구 국가대표 감독, 남북 고위급회담차 평양을 방문한 강영훈 총리 등이 가족을 만났다. 비공식 만남은 1990년 남북교류협력법이 만들어져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중국을 통한 상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