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백남준 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 퍼포먼스 위성중계

세계는 그때까지 어떤 예술가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예술의 경지에 경탄

’20세기의 르네상스 예술가’, ‘뉴미디어의 오디세이’ 등으로 불리는 백남준(1932~2006)에게 예술은 남과 달라지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수천 년 동안 미술의 절대적 재료로 사용되어온 종이와 헝겊을 폐기처분하고 이전의 예술가들이 상상조차 못했던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독자적인 예술 장르를 창조해 낸 20세기 미술계의 혁명가였다. 비디오 아트가 입체파의 피카소나 기하학적 추상의 몬드리안처럼 뚜렷한 자기 지분을 갖고 미술사에 당당히 등재되었다는 점에서 비디오 아트의 등장은 20세기 미술사의 중요한 분수령이기도 했다.

비디오 아트의 전주곡 성격을 띤 백남준의 첫 전시회가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것은 1963년 3월 11~20일이었다. 백남준은 ‘음악전람회-전자 텔레비전’ 제목의 이 전시회에 피아노 4대와 TV 수상기 13대를 설치했다. 입구에는 갓 잡아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의 머리를 매달아 놓았다. 텔레비전 화면은 온전한 것이 없었다.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 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하도록 조작했으며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 배치했다.

전시가 막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전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1921~1986)가 난데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더니 주저 없이 피아노 한 대를 도끼로 부숴버리는 해프닝을 벌였다. 백남준과 사전에 협의한 것은 아니었다.

전시회는 이처럼 황소 머리와 피아노 부수기로 시작부터 화제를 뿌리긴 했으나 13대의 텔레비전 작품은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과학을 접목한 새로운 예술의 등장을 비평가들과 언론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전시회는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첫 장을 장식하고 이후 도래할 백남준의 신화를 예고한 사건으로 20세기 예술사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전위예술가들이 그러했듯 백남준 역시 이 전시회를 통해 상업주의의 거대한 표상이자 대중의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백남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텔레비전을 과학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소통을 위한 예술매체로 격상시키는 즉 “첨단과학과 첨단예술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1960년대는 물론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을 예술의 한 요소로 원용할 생각을 한 예술가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서 백남준의 시도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20세기의 거장 예술가 반열에 올라

백남준은 서울 서린동에서 거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덕에 풍요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광복 후 국내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의 사장이었다. 백남준은 1945년 입학한 경기중학에서 음악교사 신재덕에게 피아노,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과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건너간 홍콩에서 1949년 로이든 스쿨을 졸업하고, 잠시 귀국했을 때 터진 6․25전쟁을 피해 1951년 일본 도쿄대 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미학,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하고 1956년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 논문으로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은 예술 욕구를 채워줄 신천지였다. 그곳은 자신의 예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지인들과 스승들을 이어주는 ‘만남의 장소’였다. 뮌헨대에서 음악사를 배우고 프라이부르크음대에서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를 사사한 그는 1958년 8월 소음과 침묵조차 음악적 소리로 인식한 존 케이지(1912~1992)를 만나 전위예술에 눈을 떴다.

전통 악기 대신 플라스틱, 새털, 장난감 인형 등으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하며 종래 음악의 정의를 해체한 케이지와의 만남 이후 백남준은 기존에 옳다고 믿던 가치나 제도를 예술의 언어로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에 골몰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이후 그를 유명하게 만든 피아노 부수기 퍼포먼스로 나타났다. 백남준이 악기를 때려 부순 것은 악기로 상징되는 전통과 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1959년 말 독일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것으로 퍼포먼스에 뛰어들고, 1960년 공연 중 객석으로 내려가 케이지의 넥타이를 칼로 잘라버려 ‘음악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남준은 1962년 보이스 등과 함께 미국의 건축가 조지 마키우나스가 창설한 전위 예술 그룹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 플럭서스를 예술 활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백남준에게 TV는 바보상자가 아니라 예술적 매체

백남준이 텔레비전에 주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멍하니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텔레비전을 예술의 대상으로 인식한 그는 텔레비전의 작동 원리를 공부하고 본성을 파고들었다. 독학으로 물리학과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13대의 텔레비전을 사들여 화면을 변형시키고 조작하는 기술 개발에 몰입했다. 이 텔레비전은 1963년 3월 첫 전시회 때 동원되었다.

백남준은 1964년 6월 전위음악가 샬럿 무어먼이 주도하는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해 물통에 머리를 처박고 피아노를 치는 등의 괴이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1965년에는 뉴욕타임스로부터 호평을 받은 ‘전자 예술’이라는 제목의 첫 전시회를 열었다.

1967년 2월에는 무어먼과 함께 연출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알몸의 무어먼이 첼로를 안고 뒹굴며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하도록 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무어먼은 젖가슴을 드러낸 채 첼로를 연주했다가 외설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 표현의 자유 논쟁’으로 비화되어 한동안 미국의 예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백남준에게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라 예술적 매체로 인식되었다. 이는 단순히 표현 수단의 확장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적 관행에 대한 반란이자 혁명이었다. 백남준은 1971년 세 번째 개인전 ‘일렉트로닉 아트3’을 열었다. 존 레넌과 그의 아내 오노 요코도 관람한 이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이듬해에도 ‘일렉트로닉 아트4’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텔레비전 부처’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중에서 처음 팔렸다.

 

‘비디오 아트’의 등장은 20세기 미술사의 분수령

백남준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은 1982년 4월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연 회고전이었다. 구겐하임, 뉴욕현대미술관과 함께 뉴욕의 대표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휘트니미술관 전시는 비디오 아트라는 예술 장르가 현대미술의 꽃이라는 사실을 선포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백남준을 비로소 세계적인 전위예술가로 우뚝 솟게 해준 것은 1984년 1월 1일 뉴욕과 파리를 실시간으로 잇는 위성중계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존 케이지와 요제프 보이스, 춤꾼 머스 커닝햄, 가수 겸 배우 이브 몽탕 등이 총망라된 퍼포먼스의 의도는 “텔레비전이 독재자의 명령을 하달하는 정치적인 도구로 기능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예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뉴욕과 파리는 물론 베를린과 서울을 우주 중계로 연결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KBS TV를 통해 국내 안방에도 실시간으로 소개되었다. 세계는 그때까지 어떤 예술가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예술의 경지에 경탄했다.

백남준은 1993년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997년 독일의 ‘카피탈’지가 선정한 현존 최고 미술가 100명에 꼽히는 등 세계 주요 매체들이 선정한 20세기 대표 예술가 명단에도 이름을 올려 명실상부한 20세기의 거장 예술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무서운 열정과 집념은 1996년 결국 그를 뇌졸중으로 쓰러뜨렸다. 그래도 휠체어에 앉아 오른손만으로 2000년 2월 뉴욕 구겐하임 회고전에 전시된 레이저 폭포 ‘야곱의 사다리’를 거뜬히 선보였고 2001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전,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 작품까지 해냈다. 2006년 1월 29일 미국에서 타계한 그의 유해는 화장 후 한국, 미국, 독일에 나뉘어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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