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성철 조계종 종정 추대

등을 대고 눕지 않는다는 ‘장좌불와’ 정진 8년 동안 계속해

1980년의 ‘10․27 법난’은 한국 현대 불교계의 최대 치욕이었다. 불교계가 위기 국면을 타개할 인물로 주목한 것은 좀처럼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철(1912~1993) 스님이었다. 성철은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했다. 그러면서도 성철은 1981년 1월 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종정 추대식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이 종정 수락 법어를 대독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兮 水是水兮·산시산혜 수시수혜). 해와 달과 별이 일시에 암흑이구나(日月星辰一時黑·일월성신일시흑). 만약 이 가운데 깊은 뜻을 알고 싶다면(欲識箇中深玄意·욕식개중심현의) 불속의 나무말이 걸음걸음 가는 도다(火裏木馬步步行·화리목마보보행).’

알쏭달쏭한 이날의 취임 법어는 이후 저잣거리에서, 대폿집에서, 가정에서, 대학에서 순식간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성철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일생을 엄격한 수행승으로 살며 속세를 멀리해 불자들에게만 큰스님으로 떠받들어지던 성철이 69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비로소 ‘전국구 스타’로 유명해진 것이다.

성철은 경남 산청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명민했다.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결혼까지 한 그가 영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리산 대원사에 들어간 것은 23살 때인 1935년이었다. 1936년 겨울 성철의 비범함을 전해 들은 해인사의 동산 스님이 성철을 해인사로 불러 출가를 권유했다. 성철은 1937년 3월 동산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이영주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출가 2개월 뒤에 딸이 태어나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딸은 이후 성철이 지어준 ‘불필’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성철은 1940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중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부터 등을 대고 눕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 정진을 8년 동안 계속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20여 명의 스님과 함께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식민 불교를 밀어내고 조선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초석이 되었다. ‘봉암사 결사’는 제도 개혁이 아닌 참선 수행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불교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이었고,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는 승가 모임이었다.

결사에 참여한 스님들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는 정신에 따라 하루 2시간 이상 직접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밭일을 했다. 방 안에서는 면벽좌선하고 잡담을 금했다. 법당에서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상(像)만 남기고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들은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우리 불교에서 행해지는 주요 의식과 의례들이 모두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봉암사 결사’는 한국 현대 불교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성철은 40대 중반이던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 주위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철망을 쳤다. 이후 10년 간 속세로 나오지 않은 채 용맹정진하는 실로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보여주었다. 8년간의 ‘장좌불와’에 이어 10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성전암 8년과 경남 통영의 안정사에 딸린 천제굴의 2년까지 포함해 10년 동안 성철은 절문 밖을 나가지 않고 불경은 물론 독학으로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을 공부했다. 물리학, 정신분석학, 심령학 등 현대학문들도 깊이 연구했다.

성전암 기간은 불교 공부에 새롭게 정진했다기보다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현대적인 학문을 동원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기간이었다. 불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가 아니라 얼마든지 현대의 서구 학문에 들어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구해 읽었던 것이다.

그가 ‘동구불출’하는 동안 밖에서는 ‘불교 정화'(대처승은 ‘법난’으로 규정)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비구승의 투쟁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성철은 시류를 멀리한 채 오직 한국 불교의 진정한 내적 정화를 위해 이른바 ‘성철 불교’로 일컬어지는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했다.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

1965년 성철은 마침내 ‘동구불출’을 끝내고 경북 문경 김룡사에서 대중을 상대로 기존 불교 법회와는 차원이 다른 성철 특유의 설법 방식으로 최초의 법문을 펼쳐 보였다. 해인사 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1967년 겨울에는 대중을 위해 하루 2시간씩 100일 동안 그 유명한 ‘백일법문’을 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쇼펜하우어․아퀴나스의 종교론, 스티븐슨의 심령론 등을 원용한 그의 법문은 교단 안팎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지식인이 성철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성철은 줄곧 가야산의 해인사를 지키면서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는 공부하는 대중 스님들이 정진 중에 졸음에 빠질 때 육두문자를 섞어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라고 고함을 지르고 어김없이 등줄기를 죽비로 때린 데서 연유한 별칭이었다.

성철은 1976년 출간된 최초 저서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보조 지눌 스님이 종조(宗祖)라는 종래의 설을 뒤엎고 태고 보우 스님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종조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깨달음 문제는 1981년 출간된 두 번째 저서 ‘선문정로’에서 다뤄졌다. 성철은 저서에서 단번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선가의 적자로 선언했다. 이는 깨달음 뒤에도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보조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배격한 것이다. 성철의 선언은 1990년대 돈점 논쟁을 불러일으켜 종권 다툼과 잿밥 싸움으로 끝없이 추락하던 불교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성철은 1991년 제8대 종정으로 재추대되었으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93년 11월 4일 입적했다. 살아서는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존경을 받고 죽어서는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큰스님 반열에 오른 성철의 해인사 다비식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쩌렁쩌렁한 가르침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음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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