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사 대표들이 따라간 곳은 보안사령부 지하실

무대 뒤의 권력을 사실상 장악한 신군부가 집권을 위해 언론 장악 시나리오를 가동한 것은 1980년 초였다. 먼저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구상(3월)하고, 보안사령부 안에 언론조종반(대책반)을 설치(4월)한 신군부는 뒤이어 속전속결로 언론 통폐합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5월)하고 ‘언론종합대책안’을 작성(6월)했다. 마지막으로 ‘언론계 자체 정화·정비계획’ 보고서를 작성해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했다.

‘언론계 자체 정화·정비’로 포장된 언론 통폐합 작업은 1980년 9월 1일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이 11월 12일 ‘언론 창달계획’이란 이름의 최종보고서에 서명한 그날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부 언론사 사장과 사주들이 보안사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은 것은 그날 오후 5시쯤이었다.

서울 소재 언론사 대표들이 “노태우 사령관이 좀 보잡니다”는 말을 듣고 따라간 곳은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의 보안사령부 지하실이었다. 이진희 MBC·경향신문사 사장, 장강재 한국일보 사장, 장기봉 신아일보 사장,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홍진기 중앙일보·동양방송 회장 등 17명의 언론사 대표가 보안사에 속속 도착한 것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

어두운 조명에 책상과 의자 2개만 덩그러니 놓인 방에서 언론사 사장들은 수십 년간 가꾼 회사를 내놓으라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언론 통폐합 조치의 일방적인 통고에 “말이 되느냐”고 읍소도 하고 항변도 했지만 돌아온 건 “버텨봤자 소용없다”는 건조한 답변뿐이었다. “서빙고로 모셔” 하는 소리도 문밖에서 들려왔다. 서빙고는 보안사 분실의 별칭으로 자주 고문이 자행되던 곳이다. 일부 보안사 요원은 충주MBC 사장이 삼청교육대에 입소한 사례를 들어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언론사 대표들은 이튿날 새벽 1시까지 언론사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고 보안사에서 빠져나왔다.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사실상의 ‘강제’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도 동아방송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집요하게 강요받았다. 이 사장이 “우리는 주주총회 결의 없이 서명할 수 없다”며 거부하는 등 실랑이가 3시간 반 동안이나 계속되자 수사관이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포기 각서를 내보였다. 이병철 회장도 조금 전 보안사에서 동양방송(TBC) 포기 각서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수사관은 “동아방송을 내놓지 않으면 동아일보 자체를 통폐합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김 회장과 이 사장은 보안사가 준비한 내용대로 받아쓴 동아방송 포기 각서에 서명하고 무인을 찍었다. TBC에 대해서는 홍진기 회장이 오너가 아니라며 버티자 밤 8시 이병철 회장을 불러 포기 각서를 쓰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언론 통폐합 조치가 이뤄진 것은 1980년 11월 14일이었다. 그날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각각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 기자를 철수하며 유일한 대형 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한 것이다.

한국신문협회의 27개 회원사 대표는 11월 14일 오후 3시 30분 서울 태평로 신문회관, 한국방송협회의 31개사 대표는 오후 5시 코리아나호텔에서 같은 내용을 통과시켰다. 한국통신협회는 3일 뒤인 11월 17일 오후 신문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을 뿐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 가 도장을 찍게 한 사실상의 ‘강제’였다.

결의문 발표 후 신군부는 28개 신문, 29개 방송, 7개 통신 등 전국의 64개 매체를 14개 신문, 3개 방송, 1개 통신 등 18개 매체로 통합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기자협회보’ 등 172종의 정기간행물은 7월 31일에 이미 폐간된 상태였다.

언론 통폐합의 첫 조치는 11월 25일 이뤄졌다. 신아일보, 서울경제신문, 내외경제신문이 이날자로 폐간되어 경향신문, 한국일보, 코리아헤럴드에 각각 흡수통합되었다. 지방지 중 국제신문, 영남일보, 경남일보는 1도1사 원칙에 따라 폐간되었다. 기독교방송은 이날부터 보도방송과 작별을 고하고 복음방송에만 주력해야 했다. 11월 30일에는 TBC와 동아방송이 방송을 중단하고 KBS로 통합되었으며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은 12월 31일부로 종간하고 신설된 연합통신에 통합되었다.

지방주재 특파원 제도도 폐지되어 신문이 발행되는 지역 밖의 뉴스는 정부 지배 하의 통신사에 의존하도록 제도화했다. 방송은 KBS와, KBS가 주식의 70%를 소유한 준관영 MBC로 2원화되어 완전히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KBS는 동아방송 41억 원, TBC 277억 원 등 총 340억 원으로 방송사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인수했다.

 

전국의 64개 매체 18개 매체로 통합

동아방송은 11월 30일 새벽 5시부터 고별 특집프로그램 ‘DBS 약사 18년’을 19시간에 걸쳐 내보냈다. 동아방송의 송지헌 아나운서는 11월 30일 자정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HLKZ”로 고별방송의 끝을 맺었다. 같은 날 TBC도 눈물의 마지막 방송을 했다. 밤 11시 30분 종방까지 진행된 TBC TV의 마지막 특집프로그램은 이별과 아쉬움의 뒤범벅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 가수 이은하는 계엄당국의 고별방송 지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3개월간 방송 출연정지를 당했다. ‘고별방송에 관한 지침’이란 11월 25일 정오 뉴스를 끝으로 보도방송 기능이 정지된 기독교방송의 고별뉴스 생방송에서 담당 아나운서가 울음을 터뜨리자 이튿날 계엄당국이 동아방송과 TBC에 내린 지침이었다.

자정에 막을 내린 TBC 라디오의 마지막 10분간은 황인용 아나운서가 울먹이는 소리로 채웠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불러보겠습니다. 여기는 HLKC 639kHz 동양방송입니다.”

언론인의 대량 해직은 언론 통폐합에 앞서 단행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밤 8명의 기자를 연행한 것을 시작으로 6월 9일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해 국론통일과 국민적 단합을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8명의 현직 언론인을 연행·조사했다. 이들의 연행·구속은 언론계에 불어닥친 태풍의 서막이었다. 대량의 언론인 해직이 7월 중순부터 8월 초에 걸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7월 30일 각각 임시총회를 연 한국신문협회, 한국방송협회, 한국통신협회는 ‘언론 자율 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를 채택, 자율 결의임을 강조했으나 이에 앞서 보안사가 해직자 명단을 작성, 각 언론사에 전달한 뒤였다.

해직조치로 언론계를 떠난 언론인은 서울 365명, 지방 352명 등 모두 717명이었으며 이중 20명이 옥고를 치렀다. 1988년 국정감사 때 문공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해직자는 경향신문 34명, 동아일보·동아방송 32명, 신아일보 36명, 중앙일보·TBC 30명, 조선일보 14명, 한국일보 32명, KBS 86명, MBC 46명, 국제신문 31명, 부산일보 18명, 전남일보 19명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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