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 건너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권력 찬탈을 위한 신군부의 움직임이 동시에 네 곳에서 진행되었다. 그 시각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기 위해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3명의 대령과 7명의 보안사 수사관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대기했다. 같은 시각 정승화 총장의 합법적인 연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노태우 9사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 황영시 제1군단장 등 신군부의 주요 장성 9명이 경복궁 내 30경비단에 모인 것도, 신군부의 치밀한 계략에 말려 우국일 준장의 초청으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연희동 요정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도 6시 30분이었다. 이처럼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은 12․12 군사쿠데타의 출발점이었다.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1979년 11월 중순 경이었다. 전두환은 정치군인들의 사조직인 ‘하나회’ 소속 장성·대령들과 이 문제를 상의하고 은밀히 계획을 준비했다. 당시 전두환과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항간에는 전두환이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전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실제로 정승화 총장은 12․12 쿠데타가 일어나기 사흘 전 전두환의 잦은 월권을 이유로 노재현 장관에게 전두환의 교체를 꺼낸 적이 있었다.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세 대령이 정승화 총장의 한남동 공관에 도착한 시간은 12월 12일 6시 55분이었다. 해병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으나 총장께 보고할 일이 있다고 둘러대 통과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경호실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이 장교 4명과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세 대령의 뒤를 따랐으나 아직 정문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시간 정 총장은 2층 거실에 있었고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 4명은 1층 응접실에 있었다.

7시 정각, 공관에 들어선 허삼수·우경윤 두 대령은 1층으로 내려온 정 총장에게 김재규의 돈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며 진술을 받아야 하므로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까지 동행을 요구했다. 정 총장은 버럭 화를 내며 부관인 이재천 소령에게 총리공관이나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대라고 지시했다.

이 소령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순간 옆에 있던 보안사 수사관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했다. 이 소령이 고꾸라지자 김인선 대위가 전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또다시 수 발의 총탄이 김 대위에게 발사되었다. 다행히 이 소령은 4~5분 뒤 의식을 회복해 병원으로 실려갔고, 김 대위는 5발의 총알을 맞은 뒤 초겨울의 연못에 2시간 동안 숨어 있다가 부하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두 사람은 목숨을 건졌다.

허삼수·우경윤 두 대령과 옥신각신하던 정 총장은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보안사 수사관의 M16 개머리판에 얼굴을 맞고 안경이 떨어져 나갔다. 두 대령은 기선을 제압당한 정 총장을 끌고 공관을 빠져나와 7시 30분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들에게는 생사를 넘나들었던 30분이었다. 다만 성 대령은 해병에 붙잡혀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차가운 콘트리트 바닥에 무릎이 꿇리는 수모를 당했다.

 

3명 숨지고 16명 부상한 긴박했던 12시간

비슷한 시각, 총리공관으로 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 대행이 노재현 국방장관을 거치라며 재가를 거부하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최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했다기보다 노재현 장관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면피용 처세였다. 문제는 노재현 장관이 사라져 행적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노재현은 국방장관 공관에 머물다 100m 정도 떨어진 총장 공관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듣고 어디론가 피신해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전두환은 6명의 선배 장성들과 함께 다시 총리 공관을 찾아가 최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온 것은 노 장관을 찾아오라는 대답뿐이었다.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장태완·정병주 두 사령관에게 밤 7시 40분 쯤 정 총장 연행 사실이 전해졌다. 장태완은 곧바로 수경사로 귀대했고 정병주는 자택을 거쳐 9시쯤 특전사에 도착했다. 정 총장 공관에서 양측의 출동이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곳곳에서 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이 군 상층부에 전해지면서 상황은 일촉즉발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신군부 측이 전두환을 정점으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한 데 반해 진압군은 중심점이 없이 분산된 행동을 보여 결과는 신군부 측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태 파악을 못한 장태완과 정병주는 반란군에 체포되었다. 정병주는 자신의 예하 부대원이 쏜 총에 맞아 체포되었고, 그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목숨을 잃었다. 정병주는 이때의 일을 괴로워하다 1989년 3월 한 야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노재현은 국방장관 공관에서 총성을 듣고 한미연합사가 있는 미8군으로 피신했다. 그곳 지하벙커에는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과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있었다. 노재현은 지하 벙커에 들어서자마자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절대로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지시한 뒤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과 통화를 한 후 새벽 무렵 자진해서 국방부로 갔다.

노재현이 국방부로 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신현확 총리는 새벽에 자신이 직접 국방부를 찾아가 노재현을 데리고 나왔다. 노재현은 새벽 4시쯤, 보안사에 들러 전두환으로부터 협조를 부탁받은 뒤 신현확과 함께 최 대통령이 있는 총리공관으로 갔다. 그리고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 대통령에게 재가를 건의하고 최 대통령은 연행 건의서에 서명했다. 3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했던 긴장의 12시간, 신군부는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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