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농민의 피와 땀, 기업가·관료의 분발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광복 직후인 1946년 당시 한국의 수출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 단 두 나라였다. 연간 수출액은 350만 달러.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전문지 ‘포린어페어’지는 1960년 10월호에서 한국에 대해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960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0달러 이하, 수출은 20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라며 “한국의 경제 기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분석했다.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의 수출은 4100만 달러였다. 1962년 5400만 달러, 1963년 8300만 달러로 수출이 증가하긴 했어도 수출 품목의 대부분은 농산물과 광산물이었다. 수출 품목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 것은 1963년이었다. 일본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보세가공 등에 치중한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1963년 공업제품 수출이 1위(32.4%)로 올라섰다. 공업제품이라고 해도 단순 가공품인 합판이 최대 수출품이었을 정도로 기술이 뒷받침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1964년 11월 30일 돌파한 1억 달러 수출이었다. 정부는 이에 맞춰 그 해 12월 5일 제1회 ‘수출의 날’로 정해 기념했다. 이듬해부터는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기념하며 수출 역군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억 달러는 다른 나라에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다. 1964년에 일본은 50억 달러를 넘어섰고 태국은 7억3000만 달러, 필리핀은 4억5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심지어 북한조차 우리보다 앞섰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의 전 과정을 군사작전처럼 진행했다. 수출을 독려하기 위해 1964년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를 설립하고 1965년 수출진흥위원회(1962.12 발족)를 수출진흥회의로 확대 개편해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수출 전선의 총사령관답게 청와대 집무실에 월별 수출 실적을 그래프로 그려놓고 관련 공무원과 기업인들을 수시로 불러 독려했다.
1965년은 한국의 수출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한 첫해였다. 박 대통령은 그해 신년사에서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구호를 주창하며 2차대전 직후 영국 총리 처칠이 외친 “수출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호소를 인용하면서 수출을 강조했다. ‘수출은 성장의 엔진’,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1965년이었다. 농․광산물과 천연물 수출에 이어 주력 수출상품이 된 것은 1963년부터 10년 동안 가장 많이 수출된 합판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가발이 수출역군 대열에 동참했으며 1970년대 들어서는 어린 여공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섬유류가 전면에 나섰다.
‘전 세계의 시장화’ ‘전 산업의 수출화’
박 대통령은 빠르게 증가하는 수출 결과에 고무되어 1972년 11월 30일 열린 제9회 수출의 날 치사에서 “1980년대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해의 수출 실적이 16억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목표였으나 그렇다고 지난 10여 년 동안 급성장한 수출실적에 비추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후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수출은 국력의 총화’, ‘전 산업의 수출화’, ‘전 세계의 시장화’ 등 수출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캐치 프레이즈가 이어졌다. 수출행정은 금융지원 강화, 서류절차 간소화, 양산체제 지원 등으로 개편되었다. 은행 대출금리가 25%를 넘나들었지만 수출기업에는 연 6%의 저리가 적용되었다. 수출용 원자재를 수입하는 기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해 주었고 달러를 벌어들인 기업에는 소득세를 최대 80%까지 감면해주었다.
당시 230여 개나 되는 수출상사는 수출 개척의 첨병이었다. 수출상사들은 1400개에 달하는 해외지사를 통해 크고 작은 물건들을 수출한 공을 인정받아 금융 특혜를 마음껏 누리며 국내의 땅을 사들이고 빌딩을 세우며 ‘재벌’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7년 12월 22일 그토록 바라던 100억 달러 수출이 마침내 달성되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4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오늘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날입니다”라며 감격해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정부와 우리 국민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와 결정이요 승리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한다.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가 되는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불과 6년이 걸렸다.”
수출 100억 달러는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고 세계적으로는 산유국을 제외하면 세계 17~18위권이었다. 수출 품목도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공산품의 비중이 90%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도 철강, 전자, 선박, 금속, 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이 35%를 웃돌았다. 불과 십수 년 만에 농․광산물이 경공업 제품으로, 다시 중후장대형 중화학공업 제품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수출제일주의를 선언한 1962년 이래 수출신장률은 1960년대 연평균 41.1%, 1970년대에는 37.5%를 기록해 세계 최고였다. 수출 시장은 1962년부터 1977년까지 33개국에서 133개국으로, 수출 품목은 69개에서 1200개로 늘어났다. ‘전 세계의 시장화’였고 ‘전 산업의 수출화’였다.
이 날이 있기까지 박 대통령의 선택과 집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업가·관료들의 분발과 노동자·농민의 피와 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고 한국을 자본주의 발전의 쇼윈도로 만들려는 미국의 경제적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산업·지역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자원 배분이 왜곡되었으며 저임금의 희생도 눈에 띄게 늘었다. 때로는 빈껍데기 외형경쟁에 치중하다보니 외화내빈, 속 빈 강정의 측면이 있었고 파이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가속도가 붙은 수출은 1990년대부터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선박 등이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1995년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2004년에는 세계 12번째로 2500억 달러를 돌파한 국가가 되었다. 2006년에는 마침내 세계 11번째로 수출 3000억 달러, 2008년 4000억 달러, 2011년 5000억 달러를 달성한 기적의 나라가 되었다. 2011년의 총 수출액은 5578억 달러, 수입액은 5245억 달러로 우리나라는 2011년 12월 5일을 기해 연간 1조 달러의 무역 규모를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