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호왕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

갑자기 세포핵 주위의 무수한 황금빛 바이러스 무리가 눈에 들어와

1976년 4월 30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유행성 출혈열 병원․면역체 규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세계 예방의학계와 미생물학계가 반 세기 동안 매달렸으나 아무도 풀지 못한 괴질의 정체를 한국인 의학자가 마침내 밝혀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호왕(1928~ ) 박사였다.

그는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나 함흥의과대학(5년제)에서 의학도의 길을 걷다가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월남했다.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한 뒤에는 1955년 미국 미네소타대로 유학을 떠나 대학원 과정을 다시 밟고 1959년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원숭이에서의 면역전기’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서울대 의과대 교수로 부임한 뒤에도 일본 뇌염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 뇌염의 예방·퇴치에 크게 기여했다.

이호왕이 뇌염에 이어 다음 연구과제로 삼은 것은 유행성 출혈열이라는 원인 모를 괴질이었다. 세계 전 지역에 퍼져 있는 유행성 출혈열이 학계에 처음 보고된 것은 1913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이것이 집단으로 발병한 것은 1940년이었다. 당시 소련․만주 국경에서 대치하고 있던 일본군과 소련군 양 진영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발병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51년 여름에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철의 삼각지에 주둔한 미군에게 집단적으로 발병해 수년 동안 총 2000여 명이 감염되고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군사령부는 급히 ‘출혈열 연구센터’를 설치하고 미국에서 200여 명의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그중에는 장차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1976년)할 대니얼 가이듀섹과 바루크 블럼버그, 1954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존 엔더스도 있었다. 다양한 연구자들이 1965년까지 15년 동안 한국에 상주하며 4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연구비를 쏟아부었지만 정체는커녕 병원체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미국은 결국 연구소 문을 닫았으나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1968년까지 일본 주둔 의학연구소에 연구진을 머물게 해 서울을 왕래하며 출혈열에 대한 연구를 관장케 했다.

이호왕은 미 육군성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1969년 여름부터 연구원들과 함께 휴전선 일대를 누비며 등줄쥐, 갈밭쥐 등의 들쥐와 두더지, 살쾡이 등을 닥치는 대로 채집했다. 당시 미군의 연구결과는 병원체 바이러스의 숙주가 들쥐일 것이라는 기존의 실증 위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농민과 군인들에게서는 여전히 매년 2000~3000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연구원 중에도 3명이 사경을 해매기도 했다.

연구팀은 장기에서 병원체를 분리하기 위해 해마다 숙주로 추정되는 수백 마리의 들쥐를 해부하고 조직배양을 시도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연구가 답보상태에 빠져 있던 1972년 이호왕은 서울대를 떠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지속적으로 이호왕의 연구를 지원해 오던 미군 당국은 마냥 기다릴 수 없어 1976년 봄을 최종 시한으로 통보했다.

 

평생 두 개의 바이러스 발견은 기적에 가까워

초조해 하던 이호왕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1975년 연말이었다. 어느날 자신을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10년간 출혈열을 연구해온 학자”라고 소개한 사람으로부터 소책자 한 권이 배달되었는데 책에는 “출혈열 병원체는 곰팡이이며 들쥐의 폐장에서 발견된다”는 가설이 적혀있었다.

이호왕은 믿기지 않았지만 그동안 수많은 학자가 들쥐의 장기를 해부하고 실험할 때, 출혈열로 이상이 생긴 다른 장기와 달리 폐 부분 만은 멀쩡해 실험대상에서 제외해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호왕은 이평우 조교에게 등줄쥐의 폐 조직을 검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등줄쥐의 폐 조직을 형광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세포핵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황금빛 바이러스 무리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1975년 12월 20일이었다. 마침내 출혈열 병원체가 베일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호왕은 처음 환자가 발생하고 등줄쥐가 채집된 한탄강에서 이름을 따 병원체 이름을 ‘한탄 바이러스’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호도 ‘한탄’으로 지었다. 그러나 이 첫 발견은 겨우 단서를 잡은 것일 뿐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호왕 연구팀은 1976년 봄까지 등줄쥐 3000마리를 검사해 그 중 6마리의 폐에서 특이한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사실이 1976년 4월 말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된 것이다.

이후 3~4년 동안 이호왕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인정하게 된 전 세계 학계는 연구를 입증하는 논문들을 쏟아냈다. 이호왕은 1980년 집쥐도 출혈열의 숙주임을 밝혀내 평생 하나의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데 둘이나 밝혀내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병원체는 ‘서울 바이러스’로 명명되었다. 병명은 한동안 ‘한국형 출혈열’, ‘유행성 출혈열’로 불리다가 1982년 WHO에 의해 ‘신증후군출혈열’로 공식 통일되었다.

이호왕은 1978년 유행성 출혈열의 진단방법을 완성한 뒤 1980년부터 녹십자사와 공동으로 예방주사 연구에 착수했다. 1990년 마침내 개발을 완료한 이호왕과 녹십자는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유럽에 특허를 출원했다. 1990년 9월 국립보건안전원의 국가검정을 끝내고 9월 21일 ‘한타박스’라는 이름의 백신으로 전국 의료계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호왕은 유행성 출혈열의 바이러스 발견, 진단방법과 백신 개발까지 이 병의 퇴치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혼자서 모두 수행한 인물이 되었다.

의약개발사에서 바이러스를 발견한 사람이 면역체까지 발견해낸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호왕이 그 드문 인물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호왕에게는 한동안 ‘한국의 노벨의학상 후보 제1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으나 그 시절 노벨상 수상을 뒷받침하기에는 우리의 국력이 너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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