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황석영 첫 창작집 ‘객지’ 출간과 ‘장길산’ 한국일보 연재

늘 ‘경계’ 위를 걷고 걸핏하면 ‘이동’하는 유목의 삶 살아

황석영(1943~ )은 풍운아다. 그의 말대로 만주에서 ‘난민’으로 태어나 늘 ‘경계’ 위를 걷고 걸핏하면 ‘이동’하는 유목의 삶을 살았다. 수 년마다 큰 변화를 겪은 그의 이력을 알고 있는 한 지인이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동아시아 현대사가 되겠다”고 할 정도로 그의 삶은 변화무쌍했다.

황석영은 만주 장춘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외가가 있던 평양에 머물다 1949년 38선을 넘어 서울 영등포에 정착했다. 7살에 6․25 전쟁을 겪고 경복고 시절이던 1961년 전국 고교문예 현상공모에 당선되는 등 일찍부터 문재를 날렸다. 경복고 3학년 때이던 1962년 고교를 중퇴하고 방랑하다가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그해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타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전국을 떠도는 방랑은 1964년 숭실대 철학과에 입학해서도 멈추지 않았다. 공장의 견습공과 공사판의 막노동꾼, 때로는 사찰의 행자 생활을 하며 훗날 소설의 자산이 될 밑바닥을 하나 둘 체험했다. 그 사이 자살도 두 번이나 시도했다.

1966년 해병대에 입대하고 이듬해 참전한 베트남전에서는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극한의 체험을 했다.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은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탑’과 2년 뒤에 발표한 ‘낙타누깔'(1972년), 그리고 ‘무기의 그늘'(1부 1985년, 2부 1988년) 등에 투영되었다. 황석영은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과 함께 희곡 ‘환영의 돛’까지 가작 당선되어 신진작가로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황수영이라는 본명 대신 황석영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때였다.

황석영은 1970년 동국대 철학과 3학년을 중퇴하고 1971년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노동문제와 노동쟁의를 다룬 중편소설 ‘객지’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객지’는 “참여적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 “민중문학의 새 장”, “1970년대 소설사의 출발”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문학 안팎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사회의식화 교과서로 자리매김한 ‘객지’

1974년은 황석영 문학이 본격적으로 발화한 해였다. 1974년 3월, ‘입석 부근’, ‘객지’, ‘낙타누깔’을 비롯 분단문제를 건드린 ‘한씨 연대기’, 부랑노무자의 귀향길을 작품화한 ‘삼포 가는 길’ 등 12편의 중․단편을 모은 첫 창작집 ‘객지’를 출간함으로써 19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부상했다. ‘객지’는 이후 1970년대 사회의식화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객지’도 ‘객지’였지만 황석영을 대형 작가로 키운 것은 ‘장길산’이었다. 구월산의 의적 장길산의 일대기를 축으로 당시 지배층과 사회 모순에 맞서는 민중의 모습을 담은 ‘장길산’은 1974년 7월 11일 한국일보에 첫선을 보인 뒤 장장 10년 동안 연재되다가 1984년 7월 5일 2092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84년 현암사에서 출간된 단행본과 1995년 창비사에서 낸 개정판을 포함해 지금까지 팔려나간 부수만 400만~500만 부에 이른다.

‘장길산’을 연재하던 1976년 황석영은 민중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광주와 제주 등지에서 현장문화운동을 병행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겪은 광주항쟁의 경험은 1985년 5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로 기록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황석영은 1985년 서울로 올라와 소설가를 겸한 반정부 운동가로 본격 변신했다.

당시 황석영의 모습은 소설가보다 운동가에 가까웠다. 1987년 9월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와, 기존의 예총에 맞서 1988년 11월 창립된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주비위원장을 역임했다. 1988년 4월 베트남전의 모순된 도덕성을 그린 ‘무기의 그늘’ 2부를 완성하고 1989년 2월 ‘무기의 그늘’ 일어판 출판기념회에 참석차 도일했다가 일본에서 3월 20일 입북을 감행함으로써 문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소영웅주의”라는 비난에서부터 “분단시대 작가로서의 용감한 행동” 등의 찬사에 이르기까지 찬반의 평가가 줄을 이었다.

황석영은 북한에서 1개월을 머문 뒤 1989년 4월 24일 북한에서 나와 북경과 도쿄에서 머물다 5월 19일 서독을 정치 망명지로 선택했다. 1991년 11월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길 때까지 황석영은 수 차례 북한에 드나들며 김일성의 환대를 받았다.

이렇게 유럽과 미국에서 5년을 지내는 난민 생활을 하다 보니 황석영은 국내에서 글이 쓰고 싶어졌다. 1993년 4월 27일 귀국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옥이었다. 감옥은 또 다른 투쟁터였다. 5년 동안 18번이나 단식투쟁을 하느라 이가 11개나 빠졌다.

 

1980년대의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1998년 3월 13일의 석방은 황석영이 10년 만에 다시 남한 땅의 작가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석영은 오랫동안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왕성하게 장편소설들을 쏟아냈다. 5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공글리고 삭힌 각종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1999년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2000년 출간한 ‘오래된 정원’은 13년 만에 나온 소설이었다.

‘손님'(2001년)과 ‘심청'(2003년)을 펴냄으로써 감옥에서 공언하던 이른바 ‘동아시아 3부작’을 마무리한 황석영이 새롭게 손을 댄 것은 ‘삼국지’였다. 감옥에서부터 번역해 온 삼국지 전 10권을 2003년 창비사에서 출간해 이문열과 장정일이 선점하고 있던 삼국지 시장에 뛰어들어 돌풍을 일으켰다.

2002년에는 전국 대학의 국문과․문예창작과 교수 및 평론가 10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0세기 한국문학사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는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2007년 탈북소녀 ‘바리’가 영국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장편소설 ‘바리데기’를 펴내고 2008년 7번째 장편인 자전적 성장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출간했다. 그러는 사이 황석영의 세계관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2000년 황석영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70~80년대 사회적 분위기는 서정성을 개인적인 감상 따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고 나 또한 그런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북한에도 가보고 징역도 살면서 이념에서 자유로워지고 어떤 편향에서 벗어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충분히 개인적인 느낌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황석영이 사안에 따라 이명박 정부를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자 당황한 진보진영은 “코미디”, “기억력이 금붕어 수준” 등의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황석영은 이미 1980년대의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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