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단군 이래 처음 경험하는 역사적 사건
우리 민족에게 먹거리 부족은 피눈물이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그랬다. 춘궁기인 보릿고개 때만 되면 많은 사람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했고, 미국의 잉여식량 무상원조로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 자급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경제성장도, 국가안보도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는 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인식이었다.
식량자급을 하려면 품종 개량이 급선무였으나 당시의 국내 농업기술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품종 개량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식량 절약이었다. 식량 절약의 첫 시도는 1967년 시작된 혼․분식 권장정책이었다. 1968년부터 음식점의 25% 혼식이 의무화되었고, 1969년부터 매주 수․토요일 11~17시 쌀을 원료로 한 음식판매가 금지되었다.
1970년부터는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을 벌여 한 톨의 쌀이라도 아끼려고 몸부림을 쳤다. 쥐잡기가 정부 주도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지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조직적이고 거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1970년 들어서였다. 1970년대 초 통계에 따르면 1억 마리의 쥐들이 축내는 양곡은 연간 32만t에 달했다.
1970년 1월 26일 벌인 제1차 쥐잡기운동에서 ‘4300만 마리를 잡아 106만6000 석의 양곡 손실 방지 효과를 올렸다’는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가히 놀랄 만한 성과였다. 1970년 5월 15일의 제2차 쥐잡기운동은 7200만 마리의 쥐를 박멸해 182만 석의 양곡 손실을 막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외국쌀 사 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녹색혁명은 1960년 미국의 록펠러․포드 재단이 필리핀 농과대 구내에 설립한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싹이 텄다. 서울대 농대 교수인 허문회(1927~2010)는 1964년 7월부터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그의 꿈은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기적의 쌀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1966년 IRRI 최초의 다수확 품종으로 발표된 ‘IR8’ 볍씨에 주목했다.
허문회는 ‘IR8’이 발표되기 전인 1965년 11월 내냉성이 강하고 미질이 좋은 일본의 ‘유카라’와, 미질이 푸석푸석하지만 수확량이 좋은 대만 재래종 ‘TN1’을 교배(IR568)했다가 ‘잡종 불임’이라는 실패를 경험하긴 했지만 교배 연구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
허문회는 1966년 3월 자신이 교배한 ‘IR568’과 국제미작연구소의 ‘IR8’을 교배한 끝에 그해 6월 20여 개체의 3계 잡종 종자(F1, 1대 종자)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 종자에는 IRRI의 667번째 교배라는 뜻으로 ‘IR667’이라는 교배번호가 부여되었다.
일반적으로 쌀은 자포니카계(일본계)와 인디카계(인도계)로 구분된다. 일본의 ‘유카라’는 자포니카계, 대만의 ‘TN1’은 인디카계이고 ‘IR667’은 자포니카계와 인디카계의 잡종이지만 인디카계로 분류되었다. 자포니카계는 차지고 밥맛이 좋은 대신 수확량이 적은 반면 안남미라 불리는 인디카계는 푸석푸석해 밥맛이 없는 대신 수확량이 많은 것이 장점이었다.
허문회는 1966년 7월 귀국했으나 1969년까지 필리핀을 오가며 ‘IR667’의 실험재배를 반복한 끝에 1969년 여름, 종자가 우수한 6계통(수원 213호~218호)의 F7을 선발했다. 특히 1970년 여름 IR667-98-1-2(F9)가 최고의 다수확 품종인 것으로 입증되자 1971년 초 ‘통일벼’ 품종으로 정식 인정을 받았다. 당시 언론은 통일벼를 ‘기적의 볍씨’라며 크게 보도했으나 한국인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았다.
그러나 1971년 2월 5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쌀밥 품평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색깔-좋음’, ‘차진 정도-보통’, ‘밥맛-좋음’이라고 평가하고, “비싼 돈 주고 외국쌀 사 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라고 일갈하자 맛이 없다는 불만은 잠잠해졌다. 박 대통령의 한마디는 통일벼를 통해 한국의 녹색혁명을 이루자는 돌격신호와 다름없었다. 1971년 전국 550개소 2750㏊에 처음 통일벼가 심어지고 재래종보다 훨씬 많은 1단보(10㏊)당 평균 500.9㎏이 출수되어 다수확의 가능성이 확인되자 정부는 이듬해 더 많은 지역에 통일벼를 심었다.
‘주곡 자립’의 문 활짝 열어
1972년은 쌀 자급 달성에 초석을 다진 우리 벼농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역사적인 해였다. 미질 불량을 이유로 농민들이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일선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독려와 강제 덕에 전국 5174 농가 18만7471ha에서 통일벼가 재배되는 성과를 거뒀다. 수확 전에는 한발(6~7월), 수해 및 저온(8~9월), 우박(9월) 등의 자연재해가 겹쳐 수확량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보도가 잇따랐으나 막상 추수를 마치자 통일벼는 1단보(10㏊)당 평균 386㎏을 수확해 재래종의 321㎏에 비해 20% 이상 증수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다수확 품종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도 농민들은 자연재해 때문에 당초 예상보다 작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정부의 강제와 권유로 통일벼를 심었으니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이 때문에 ‘기적의 볍씨’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훼손되어 통일벼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1년 더 심어보고 그때 가서 재평가하자”고 결론을 내린 덕에 통일벼는 1973년에도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다. 다만 재배면적은 1972년보다 35% 줄어든 12만1179㏊로 축소되었다. 다행히 1973년엔 1단보당 481㎏을 생산해 재래종(350㎏)보다 훨씬 많은 수확량을 기록했다.
1974년 역시 통일벼 재배지역(18만 900㏊)에서 대풍을 기록한 덕에 쌀 수확량은 3086만 섬을 넘어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3000만 섬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유신, 밀양23호, 수원264호, 노풍 등 신품종들이 잇따라 개발․보급되면서 1975년엔 22%의 면적에서 단보당 평균 503㎏을 생산하고 3242만 섬을 기록해 마침내 쌀 자급의 원년을 기록했다.
1976년엔 44%의 면적에서 3596만 섬을 거두어 단군 이래 최고 수확량을 기록하고 1977년엔 4170만 섬을 넘어 사상 처음으로 4000만 섬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우리 민족이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단군 이래 처음 경험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넘쳐나는 통일벼 덕분에 14년 만에 쌀 막걸리가 허용(1977년 12월 8일)되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쌀 48만6000섬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8․15 해방 후 수없이 겪어왔던 미곡 부족과 쌀 파동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비로소 ‘주곡 자립’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후 수 년간 도열병과 냉해 등으로 작황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재고는 계속 늘어나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고,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완한 수확량 좋은 품종이 잇달아 개발되면서 1990년엔 장려품종에서 제외되었다. 1992년부터는 정부가 수매를 중단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년 동안 주곡자급 달성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다하고 명예롭게 퇴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