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어
남진(1945~ )의 당초 꿈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에게 먼저 찾아온 기회는 가수였다. 대학 1학년 때 작곡가 한동훈의 문하로 들어가 2년 동안의 연습을 거쳐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 1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진은 다시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도시적인 미남형의 외모를 무기로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있어요’ 등 전통 트로트 주법의 노래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스타덤에 올랐다.
지구레코드 전속가수로 스카우트된 뒤에는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 ‘너와 나’, ‘우수’ 등을 발표해 인기를 이어갔다. 이를 계기로 박춘석·남진 콤비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이미자와 함께 박춘석 사단의 대표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의 히트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와 ‘가슴 아프게’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는 주연을 맡아 영화배우로도 활약했다. 남진은 이후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해 사실상 엔터테이너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입영 대상자가 되어 연예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한다는 말을 듣고 1969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런데 군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그해 7월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다. 발표 때까지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남진도 갑작스러웠지만 팬들도 충격을 받았다. 이후 팬들은 ‘선데이서울’ 등의 주간지를 통해 남진의 군복 입은 사진을 보며 그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다.
남진은 이런 팬들의 성화에 힘입어 1970년 9월, 25일간의 특별허가를 얻어 잠시 귀국해 5장의 신규 앨범을 쏟아냈다. 1971년 4월 제대한 남진은 1971년 9월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가졌다. 공연에는 우리나라 가요사상 첫 ‘오빠부대’가 등장하고 암표가 거래되어 제대 후에도 인기가 전혀 식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남진이 베트남에 있는 동안 국내 트로트계를 석권한 것은 나훈아(1947~ )였다. 그는 서라벌고 2학년 때 우연히 동네 음악학원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1966년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데뷔했다. 처음 녹음한 4곡 중 ‘천리길’을 여러 사람이 내는 LP 음반에 끼워넣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천리길’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호의 노래 ‘황금의 눈’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곧 금지곡으로 묶였다. 오아시스는 미리 녹음해둔 4곡 중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 등 3곡을 다른 LP 음반에 끼워넣어 1968년 시장에 내놓았다. 반응은 뜨거웠고 나훈아는 서서히 스타로 발돋움했다.
“눈뜨고는 못볼 지경, 남진․나훈아의 과열경쟁”
나훈아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던 1971년 남진이 제대했다. 나훈아 홀로 독주하고 있을 때 남진의 가세는 국내 무대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비교되면서 팬들도 양쪽으로 갈렸다. ‘시민회관서 숙명의 대결 1라운드’(일간스포츠, 1971년 10월 4일) 기사제목이 말해주듯 두 사람의 경쟁구도는 숙명이었다.
라이벌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때는 방송사마다 10대 가수 시상식을 열리던 1971년 말이었다. 시상식마다 양측 팬들의 꽃다발 공세가 멈추지 않았고, 울부짓듯 무대 위로 올라가 남진·나훈아의 품에 뛰어들어 키스 공세를 펼치는 극성팬도 있었다. “눈뜨고는 못 볼 지경, 남진․나훈아의 과열경쟁”(1972.1.16 주간조선)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신문과 잡지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두 사람은 서울시민회관에서도 경쟁적으로 리사이틀을 열어 상대를 자극했다. 1971년 9월 시민회관에서의 남진 귀국 리사이틀에는 4만 명의 관객이 들어차고 그해 10월 추석을 맞아 개최한 나훈아 리사이틀에는 3만2000명이 몰렸다.
1971년의 리사이틀은 남진의 판정승이었으나 1972년의 2라운드는 나훈아의 승리였다. 나훈아가 1972년 2월의 리사이틀에서 5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것과 달리 남진은 3월의 리사이틀에서 3만 명 밖에 끌어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간의 과열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가요역사상 그때처럼 꽃을 활짝 피우고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둘의 경쟁은 1971년부터 불어닥친 ‘포크송 붐’에 대한 트로트 진영의 마지막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1972년 남진이 생애 최고 히트곡 ‘님과 함께’로 전국의 방송가를 달구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란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훈아 역시 ‘물레방아 도는데’, ‘고향역’, ‘녹슬은 기찻길’ 등 트로트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트로트 황제’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렇게 경쟁구도가 분명하게 형성된 것은 두 사람 간의 대조적인 캐릭터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정치권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영․호남으로 서로 라이벌인 상황에서 둘은 목포(남진)와 부산(나훈아)으로 고향이 달랐다.
게다가 남진은 웃음 띤 얼굴에 잘생긴 미남형이었고 나훈아는 소도둑 같은 외모에 거친 인상이었다. 음악적으로는 부단한 연습을 통해 노래를 완성해가는 남진과 달리 나훈아는 악상 설명만 듣고도 이를 소화해낼 줄 아는 타고난 노래꾼이었다. 남진이 세련된 스타일의 춤과 비트 강하고 리듬감 넘치는 노래를 부를 때 나훈아는 소리를 꺾고 비틀며 감정을 집어넣는 창법을 구사했다.
나훈아의 트로트 가창은 한국 트로트 역사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일본 엔카가 가지고 있는 섬세하고 유약한 여성적인 발성의 틀에서 벗어나 강인한 남성성을 극적으로 구현하는 대륙적인 울림을 창조했다.
라이벌 관계는 뜨거웠으나 오래가지는 않아
서울시민회관은 두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대규모 리사이틀 장소로도 의미가 컸지만 사건사고로도 인연이 끊이지 않았다. 나훈아는 1972년 6월 4일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온 남자가 깨진 병을 휘둘러 얼굴을 72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범인은 “인기 연예인의 피를 보고 싶었고 그래서 유명해지고 싶었다”고 범행 동기를 밝혔지만 나훈아의 팬들 중에는 남진이 배후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남진은 큰 정신적 피해를 보았다.
1972년 12월 2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MBC 주최의 ’10대 가수 청백전’에서 남진이 가수왕으로 발표되어 박수를 받고 있던 오후 8시28분 시민회관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남진은 다행히 무사했지만 이 화재로 53명이 사망하고 76명이 부상했다.
둘은 비슷한 점도 많았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비슷했고 당대의 걸출한 가수나 영화배우와 결혼한 것도 그랬다. 나훈아는 1973년 7살 연상의 김지미와 동거를 시작해 1976년 김지미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가 1981년 헤어졌다. 남진은 1975년 가수 윤복희와 동거를 시작해 1977년 결혼했다가 1979년 이혼했다.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뜨거웠으나 생각처럼 오래가지는 않았다. 1973년 7월 나훈아가 공군에 입대하고 1976년 7월 제대 후 김지미와 결혼한 뒤 1981년까지 사실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진 역시 윤복희와 이혼한 후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다.
나훈아는 1981년 10월 다시 본격적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해 ‘싱어송 라이터’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울긴 왜 울어’, ‘잡초’, ‘무시로’ 등의 자작곡이 잇달아 히트해 트로트 가수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작곡에도 능해 자신의 2500여 곡 노래 중 800여 곡을 직접 작곡했다.
남진은 나훈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거울 같은 존재다. 나를 바라보고 비교할 수 있는 존재다. 가요사에서 우리 같은 라이벌이 있을 수 있나 싶다. 멋있는 명콤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