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전태일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분신 자살

16살 때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아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전태일(1948~1970)도 어려서부터 극빈의 삶을 살았다.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가족이 낯선 서울역에 내린 것은 전태일의 나이 6살 때인 1954년이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폭음과 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결국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린 동생들을 위해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등을 가리지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전태일이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시다(견습공)로 들어간 것은 16살이던 1964년 봄이었다. 기술을 배워 가난을 벗어나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그것은 허리도 펴지 못하는 비좁은 다락방의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보지 못한 채 하루 14~15시간을 기계처럼 혹사당하는 어린 10대 소녀들의 비참한 일상이었다.

일요 근무와 철야 작업이 예사인 그곳에서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닳고 닳아 지문이 없었다. “잠이 안 오는 주사를 사흘 밤이나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여공 앞에서 전태일은 절망하며 몸서리쳤다. 억울하다는 자각이 싹텄다. 동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가슴을 쳤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를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소모임을 준비했다. 그래서 결성된 모임이 1969년 6월의 ‘바보회’다. 인간적인 권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자신들은 바보라며 지은 이름이었다. 전태일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끼고 살았다. 전문 용어와 한자가 나오면 “내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탄식하며 읽었다.

 

정부에 수차례 진정 냈지만 돌아온 것은 무관심과 냉대 뿐

근로기준법은 어린 여공들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깨우쳐주었다. 업주들에게는 개선을 요구하고 시청과 노동청에는 수차례 진정을 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과 냉대뿐이었다. 결국 사업주들에게 위험한 경계 대상으로 인식되어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해야 했다.

전태일은 1970년 4월부터 서울 삼각산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일을 하던 중 평화시장의 형제들 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단했다. 그때의 심경을 1970년 8월 9일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전태일은 1970년 9월 평화시장에 다시 나타나 재단사로 취직했다. 바보회 회원 중 남아 있던 6명과 새로 규합한 6명의 재단사를 모아 9월 16일 ‘삼동회’를 결성했다. 삼동회는 평화시장 근로자들을 상대로 근로조건에 대한 설문지를 돌렸다. “설문지를 써주면 일요일에도 쉴 수 있다”는 농반 진반에 126명이 설문에 응해주었다.

회수한 설문지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작성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 10월 6일 노동청장 앞으로 제출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경향신문 기자에게 사정을 설명할 기회를 얻어 그들의 고충이 1970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에 ‘골방서 16시간 노동’이란 제목의 톱기사로 실리게 되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보인 최초의 관심이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난 것에 그들은 감격했고 경향신문을 사서 평화시장에 뿌렸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삼동회는 다음 단계로 10월 20일 노동청 정문 앞에서 시위를 준비했으나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던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회유하는 것에 속아 시위는 두 차례나 미뤄졌다. 전태일과 삼동회는 국정감사가 끝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당국에 분노하며 다시 시위를 계획했다. 그날은 우리 현대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1970년 11월 13일이었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고 있던 오후 1시 40분,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평화시장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나타난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평화시장 앞길을 내달리며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또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자신을 불태우며 그렇게 쓰러져간 22살 전태일은 그날 밤 10시, 명동 성모병원에서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눈을 감았다. 죽기 전 전태일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그가 사회에 던진 유언은 적중했고 어머니에게 한 부탁은 지켜졌다.

그의 분신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은 패배와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의식을 깨웠다. 그의 죽음은 1970년대를 관통하는 노학연대 투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정신적 구심이 되어 청계피복노동조합을 탄생시켰고 청계노조는 군사독재 정권 내내 한국 노동운동의 앞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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