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새마을운동 시작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결을 묻자 마을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후 서로 자진해서 협동한 결과였다”고 답했다. 박 대통령이 부산에서 주재한 가뭄 대책을 위한 전국 지방관서장회의에서 신도마을의 사례를 소개하며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한 것은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70년 4월 22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 농가는 겉보기에는 평화롭고 목가적이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5000년의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농가의 80%는 초가지붕이었고 전기가 들어오는 집은 20%에 불과했으며 식수는 우물과 샘물에 의존했다. 박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제창한 뒤 농촌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이 그해 10월 전국 3만4655개 마을에 335부대씩의 시멘트를 무료로 지급하도록 한 것은 신호탄이었다. 마침 생산과잉으로 시멘트 재고도 전국적으로 쌓여 있었다.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받은 시멘트에 자신들의 자금과 노동력을 더했다. 진입로 확장, 교량 건설, 지붕 개량, 우물 개선, 공동 빨래터 건설 등 마을의 공동사업이 전개되었다.

1971년 내무부가 사업 성과를 평가해 본 결과 1만6600여 개 마을에서는 정부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실적을 보였으나 나머지 마을에서는 성과가 미진했다. 1972년 박 대통령은 첫 해 성과가 좋은 마을에만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t씩을 추가로 배분해주도록 했다. 무차별적 시혜가 아니라 적절한 인센티브를 통한 차별화로 마을 주민의 자발적 성취 의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내무부는 전국의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했다. 그 중 자조마을과 자립마을에만 지원물자를 배분했다. 그러자 기초마을 주민들은 마을 전체가 더욱 뒤처질지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곧 그들도 마을 개량에 팔을 걷어붙였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던 농민들에게서 경쟁심, 협동정신, 노동의욕이 새롭게 살아난 것이다. 마을별 경쟁심리가 발동하자 전국에 새마을운동이 메아리쳤다. 점차 기초마을은 자조마을로, 자조마을은 자립마을로 승격하면서 3분의 1을 넘던 기초마을이 1977년에는 사라지는 큰 성과를 거뒀다.

 

농촌 여성들의 발언권 강해진 것은 생각지 못한 소득

농촌환경 개선사업에 머물던 새마을운동의 범위가 농촌 소득증대 사업으로 전환된 것은 1972년부터였다. 박 대통령이 각종 농산물과 특산작물 생산으로 큰 농가수익을 올린 경북 영일군 문성동 마을을 돌아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농촌에 “잘살아보세~” “좋아졌네 좋아졌네~”라는 노래가 울려퍼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농가소득이 급격하게 증가한 데는 새마을운동과 때맞춰 보급된 통일벼 계통의 다수확 신품종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김해평야 일대에서만 이뤄지던 비닐하우스 재배법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채소 재배와 양봉 등 다양화된 농사패턴도 농촌 수익증대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변화는 종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농촌 여성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공동사업에서 부녀자들의 역할이 남자 못지않게 커졌다는 점이었다. 농촌이 남자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남녀평등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농촌 잘살기 캠페인을 넘어 국민 의식개혁 운동이자 사회운동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사 최대·최장의 국가주도 대중운동이었고 근면·자조·협동을 강조한 ‘민족성 개조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이 도시로 퍼져나간 것은 1974년이었다. 반강제성을 띠긴 했지만 직장, 공장, 학교에도 새마을운동의 깃발이 나부꼈다. 반상회가 활성화되었고 ‘내집 앞 내가 쓸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새마을대청소가 시작되었으며, 저축하기와 거리질서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안착하는 데는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지속적인 관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6월부터 1979년 9월까지 총 134회에 달하는 월간 경제동향 보고회의를 주재하면서 꼬박꼬박 새마을 성공사례를 보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성취한 업적 가운데 으뜸

문제는 대통령의 관심이 커질수록 비례하는 부작용이었다. 공무원 인사고과에 새마을운동 성과가 반영되면서 길에서 보이는 지붕 한쪽만 페인트를 칠하는 전시행정과 허위과장 보고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논란이 되었던 것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진행된 새마을교육이었다.

1973년 5월에 세워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는 1979년까지 약 68만 명이 각종 합숙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이 새마을운동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유신정권을 지지하는 교육도 많아 비판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잘살기 운동으로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점차 반공을 강화하고 성장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한 정부의 헤게모니적 공세 조치였다는 것이다. 농촌의 소득증대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두고도 실제로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설사 기여했다 하더라도 도시와 비교한 상대소득은 한창 뒤떨어졌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박 정권의 유신독재와 맞물린 시기에 진행되다보니 “3선 개헌과 유신 독재를 지속하기 위한 대국민 세뇌교육 목적의 정치적 이벤트였다”는 혹평도 들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통치권자의 강력한 개발 의지,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여기에 관료들의 극성스러운 독려가 3박자를 이뤄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끌어냈다는 사실만은 국민 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각종 조사에 의하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우리 국민이 성취한 중요 업적’ 가운데 우리 국민이 으뜸으로 꼽는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서울올림픽 개최,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화학공업 육성도 새마을운동의 성취도에 미치지 못한다.

‘새마을운동의 교주’로까지 불렸던 박 대통령의 사망(1979년)과 함께 열기가 급속도로 식었던 것은 새마을운동의 운명이자 한계였다. 급기야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자신의 동생 전경환을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으로 앉히면서 새마을운동은 깊은 동면에 빠졌다. 새마을운동은 1988년 국정감사와 5공청문회에서 된서리를 맞아 사실상 몰락하는 듯했다.

그러나 2000년 들어 중국과 동남아,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연수생들이 줄을 지어 한국을 찾으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고, 이제는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더 인정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새마을의 날'(4월 22일)은 2011년 법정 기념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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