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인 1966년 379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서울은 가히 초만원이었다. 인구가 이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는데도 공간은 6․25 전쟁 전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좁은 데다 그것마저 느려터진 전차가 점거해버리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으로 자동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무질서의 시대였다.
이처럼 서울시 전체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교통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해결사를 자임한 이가 제14대 서울시장 김현옥(1926~1997)이다. 그는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건 결심만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대장이었다. 부산 항만사령관 시절,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5․16 후인 1962년 36세 나이로 부산시장에 발탁되었다. 김현옥은 ‘불도저’로 불리며 부산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았고 부산을 직할시로 승격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서울시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부산을 새롭게 건설한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김현옥은 1966년 4월 4일 40세 나이로 서울시장에 부임했다. 1966년은 ‘강남 신화’가 시작된 첫해였다.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도, 조선일보에 ‘강남’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1966년이었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도로의 신설․확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다리 하나, 지하도 하나를 건설하려고 해도 늘 비용이 문제였다. 그러나 개발시대의 리더십은 성숙사회의 리더십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했다. 후진 사회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다소의 부작용과 무리가 따르더라도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추진력이 필수적이었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인물이 필요하고 그 시대에는 김현옥 같은 사람을 원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원칙도 무시하고 절차도 건너뛰는 김현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두 사람은 명콤비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동이 걸리면 김현옥은 박 대통령에게 직보해 매듭을 풀었다. 거침없는 행보에 적이 많아졌지만 누군가를 욕하기보다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는 사람이 일을 하는 법이다. 예산이 책정되지 않았는데도 기공식부터 서두른 경우가 많아 예산 부서는 추가경정예산을 세우는 등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시의 행정비와 문화복지 예산은 대부분 삭감되거나 삭제되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인물 필요해
그의 재임 중 독립문~구파발, 돈암동~수유리, 왕십리~광나루, 청량리~망우리 등 서울의 외곽 간선도로가 너비 8~10m에서 35~40m로 확장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간 그리고 근대화된 이후에도 전혀 손대지 못했던 좁은 외곽 간선도로가 부임 4~5개월 만에 모두 확장된 것이다. 세종로 사거리와 명동에는 지하도를 만들고 지상에는 144개의 육교를 세웠다. 사직터널을 파고 삼각지 입체도로와 강변도로를 만들었으며 북악스카이웨이도 개설했다.
재임 중 완공은 보지 못했지만 삼청터널과 남산 1호․2호 터널, 마포대교도 착공했다. 세운상가, 낙원상가, 대왕코너 등 민자 유치사업을 추진했으며 버려진 땅 여의도를 뉴욕의 맨해튼처럼 만들겠다며 윤중제를 쌓았다.
그는 기공식에 앞서 준공일을 약속했고 이 약속은 밤낮 없는 행군으로 반드시 지켰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기공․준공 테이프를 끊은 가위를 시장실 벽면에 진열하는 것을 보람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반드시 사고를 부르게 마련이었다. 결국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시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가 만든 서울의 얼개는 한동안 그대로 이어지고 보존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서울도 그에 걸맞은 모양새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이명박 시장에게 그 역할이 맡겨졌고 이 시장은 김 시장이 세운 것을 부수고 없앴다. 성장의 시대에는 서울의 동서교통 흐름을 이어줄 고가도로가 절실했지만 환경 복원을 위해 수명이 다한 고가도로는 철거하는 게 마땅했다. 시대가 그걸 요구했다. 육교를 없애고 삼일고가도로 등 고가도로를 부쉈으며 청계천을 복원했다.
김현옥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에 힘입어 1971년 10월부터 1973년 12월까지 내무부 장관 자리를 지켰다. 1997년 1월 9일 가래가 기관지를 막아 질식사했을 때 조문객들은 “그렇게 많은 도로를 뚫은 사람이 자신의 목은 뚫지 못했는가”라며 애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