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휴전협정은 765차례의 산고 끝에 이뤄진 결실

6·25전쟁 휴전 논의는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수원까지 장악한 1951년 1월 영국, 캐나다, 인도 등이 ‘현위치 휴전안’을 유엔에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위치 휴전’이란 수원 이남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이 진출한 상태의 휴전이므로 이대로 휴전이 성사되면 서울이 공산군 수중에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현위치 휴전안’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우방국인 영국이 휴전을 주도해 공개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어 엄청난 전쟁경비를 쓰고 3만여 명의 전사자까지 나와 미국 내 여론도 좋지 않았다. 미국이 마지못해 휴전안을 지지하자 유엔 정전위원회가 1951년 1월 13일 휴전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런데 중공이 4일 뒤 휴전 결의안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승승장구하던 당시 전황에 취해서 미국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휴전안을 거부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결국 휴전안을 제안한 나라들은 미국의 노선으로 복귀해 2월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유엔 결의에 동참했다.

이런 가운데 전선이 다시 북상해 38도선을 경계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1951년 5월 중순 38도선을 경계로 한 휴전선을 공식정책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미국의 소련 문제 전문가 조지 케넌이 1951년 5월 31일 야콥 말리크 주유엔 소련 대사에게 휴전협상을 타진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도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면서 휴전 논의에 힘을 실어주었다. 6월 23일 말리크가 교전 당사자 간의 대화를 제안하고, 며칠 뒤 미․중이 지지를 표명하면서 휴전 논의가 성사되었다.

7월 10일 첫 본회담이 열린 곳은 한때 고급 요정이던 개성의 내봉장이었다. 미 극동 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을 수석대표로 한 유엔군 측에서는 미군 장성과 백선엽 소장 등 5명이 참석했다. 공산군 측에서는 남일 조선인민군 참모장과 이상조 등 3명의 북한 장성과 중공군 장성 2명이 참석했다.

회담 첫날 공산군 측이 “안전을 이유로 양쪽이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나오자”고 제의해 유엔군 측이 백기를 들고 회담장에 들어서자 공산군 측은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유엔군이 굴복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게다가 회담장에서 자기들은 높고 곧은 의자를 사용하면서도 유엔군 측에는 낮은 안락의자를 제공하는 등 유치한 신경전을 벌였다.

 

회담장에서는 ‘설전’, 전선에서는 ‘혈전’ 벌여

양측은 7월 26일 군사분계선 설정, 전쟁포로 교환, 휴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문제 등 5개 의제에 합의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이냐’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 이 문제를 타결하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주장한 반면, 유엔군은 “해·공군 전력의 우세를 반영해 현재의 접촉선보다 북쪽에 설정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우리 국민들도 전쟁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38선 정전’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회담이 지지부진할 때마다 유엔군 측은 중공과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군사적 공세를 취했다.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특히 중·동부 전선에서 적을 38선 북쪽으로 상당히 밀어 올렸다. 결국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현재의 휴전선과 유사한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어 양측은 협상의제 제3항 ‘휴전 실시와 보장’, 제4항 ‘포로 문제’, 제5항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를 병행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누가 보아도 실현이 불가능한 한국군의 단독 북진을 주장한 완고한 노 대통령의 고집 뒤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2년 넘게 지속된 협상 중에도 유엔군과 공산군은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다. 양측은 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을, 중·동부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을 벌였다. 양측의 이해관계와 계산법이 어긋나면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회담도 결렬과 재개를 반복했다. 하지만 양측은 휴전협상 전체를 파국으로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협상을 하거나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공격으로 제한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치러진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으로는 펀치볼 전투(1951.7), 피의 능선 전투(1951.8~9), 단장의 능선 전투(1951.9~10), 백마고지 전투(1952.10), 저격능선 전투(1952.10~11) 등이 있다.

 

이승만의 휴전 반대 목적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휴전협상 개시 때 유엔군의 접촉선은 임진강 하구~화천 저수지~속초를 연결하는 ‘캔자스선’이었다. 이 선은 38도선 북방 10~20km 북방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특히 유엔군은 중부전선의 적 전투력 근원지인 철의 삼각지(철원~김화~평강)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 북방에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적을 압박했다. 그래서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이곳에서 전투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측이 내놓은 모든 의제는 1952년 5월 7일까지 합의를 마쳤으나 포로교환 문제만은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 1952년 10월 8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휴전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1953.1)하고 전쟁의 배후 주동자인 스탈린이 사망(1953.3)하면서 회담 재개 필요성이 양측 모두로부터 제기되어 양측은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승만의 휴전 반대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으나 복심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이승만은 전쟁이 끝나면 동아시아 구석에서 잊힌 존재로 돌아갈 이 조그만 나라의 독립과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미상호방위조약’만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협상 카드는 “휴전을 거부하고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8일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되고 마지막으로 휴전조약 조인만이 남았을 때 이승만이 중대 결단을 내렸다.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휴전 반대 데모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6,930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이다.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격분했으나 자칫 휴전협정 조인마저 무산될지 모른다는 우려감에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은 6월 25일부터 16일 동안 이승만을 14차례 만난 끝에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하는 등의 5개항에 합의하고 이승만으로부터 휴전조약 동의를 얻어냈다.

 

양측 대표, 서명 후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곧바로 퇴장

휴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체결되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처음 시작된 이래 765차례의 산고 끝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휴전협정 조인은 유엔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쓰인 전문 5조 36항의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한 뒤 자신의 문서를 상대방에 전달하고 다시 상대방의 서명 밑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함으로써 이뤄졌다.

두 서명 당사자는 12분 만에 모든 서명 절차를 마치고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곧바로 퇴장했다.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팽덕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은 각각 후방의 사령부에서 협정문서에 서명했다. 휴전조약 조인은 인정했지만 휴전에는 반대한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에도 양측은 협정이 발효되는 밤 10시까지 상대방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공산군 측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는 모든 포탄을 쏘아댔고, 국군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이 이뤄진 데 대해 분노의 포격을 계속했다.

양측은 밤 10시부터 72시간 이내에 현 전선에서 후방으로 2㎞ 물러나는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3년 1개월 2일간을 끌며 250만 명의 남북한 한국인, 40만 명의 중공군, 3만 6,900여 명의 미군 등 모두 3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전쟁이 ‘일시 중지’를 의미하는 ‘휴전’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전쟁은 한반도를 초토화했다. 개인의 재산은 물론이고 미미한 수준이던 국가 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조차 대부분 파괴되었다. 320만 명의 피란민, 30만 명의 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등으로 우리의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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