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의 등장은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 달라는 국민적 요구에서 시작
샤를 드골(1890~1970)에게 1940년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해를 기점으로 평범한 군 장교의 삶이 프랑스 현대사에 굵고 선명한 족적을 남긴 국가 지도자의 삶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드골은 프랑스 북부 릴의 외가에서 태어나 가톨릭의 완고한 왕권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1912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그곳에는 필리프 페탱(1856~1951) 대령이 있었다. 페탱은 훌륭한 문장력과 남다른 총명함을 보이는 드골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드골은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1916년 전쟁포로로 잡혀 2년 6개월을 독일 땅에서 갇혀지냈다. 1918년 종전 후부터 2차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20년 동안은 평탄하고 평범한 군 장교 생활을 하다가 2차대전 발발 후 장군(1940.5)으로 진급하고 국방차관(1940.6)에 임명되었다. 드골이 영국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런던에 체류하고 있을 때 막 총리가 된 페탱이 히틀러에게 항복, 프랑스 땅을 고스란히 독일에 넘겨주었다. 2차대전 패배는 프랑스 국민과 드골에게 심각한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고 BBC 라디오를 통해 “본토가 점령되더라도 해외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외쳤다. 정치적 수완도 발휘해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가운데 일부 국가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고 본토의 레지스탕스와 연계해 대 독일 투쟁을 전개했다.
1944년 8월 파리가 해방된 후에는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임시정부의 총리 겸 국방장관을 겸했으나 헌법 제정 과정에서 전통적인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 좌파 및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과 충돌했다. 드골이 선호하는 헌법은 전통적 내각제가 아니라 국가원수가 주도하는 대통령제에 가까웠기 때문에 드골은 이에 불만을 품고 1946년 1월 임시정부 총리에서 사임했다. 1947년 반공 단체인 프랑스국민연합을 조직하는 등 한동안 정치 활동을 이어갔으나 프랑스국민연합 내에서도 정쟁이 일어나자 1953년 프랑스국민연합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프랑스 영광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영예에는 욕심 없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는 군소 정당의 난립과 단명 내각의 부침으로 정정이 불안했다. 내각제 하에서 의회가 정부 위에 군림하다 보니 정부는 제대로 된 정책 하나 집행하지 못한 채 불신임투표의 덫에 걸려 와해되기 일쑤였고, 이로 인해 결단성 없는 애매모호한 정치 노선들이 춤을 추었다.
대외적으로는 해방을 염원하는 인도차이나와 북아프리카 약소국의 민족독립운동을 폭력으로 억압해 2차대전 후 식민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유럽 내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샤를 드골은 이런 상황을 두고 “프랑스에는 위기가 와야 한다. 그것 말고는 265가지의 치즈 맛을 자랑하는 이 나라를 단결시킬 도리가 없다”고 꼬집었다. 그의 예측대로 프랑스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54년 11월이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봉기로 촉발된 ‘알제리 사태’가 불안하던 프랑스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에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의 식민지를 두고 있었으나 알제리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신화에 얽매여 있었다. 즉 알제리는 식민지나 보호령이 아니라 프랑스 본국의 완전한 일부이며 알제리 원주민들도 프랑스 등 유럽에서 이주한 약 100만 명의 이주자와 똑같은 자격을 갖고 있는 프랑스인이라는 신화였다.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은 ‘프랑스의 알제리’라는 이런 신화 파괴를 목표로 했다.
이런 와중에 1956년 이집트 나세르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촉발된 ‘수에즈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프랑스는 나세르가 배후에서 지원한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게다가 알제리 주둔 프랑스 군부와 이주자들은 은밀한 결속을 통해 본국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대항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265가지의 치즈 맛을 자랑하는 이 나라를 단결시킬 도리가 없다”
샤를 드골이 12년 만에 다시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알제리 사태가 야기한 군부의 불만을 무마하고 분열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만들어 달라는 국민적 요구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산당과 좌파 지식인들은 드골의 강력한 리더십과 독재자 성격을 우려해 드골의 총리 취임을 결사 반대했다.
알제리 주둔 군부는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영구적인 지배를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드골뿐”이라며 드골의 등장을 환영했다. 1958년 5월 13일 군부와 이주자들이 알제리 정부 청사를 점거한 것도 드골의 복귀를 촉구하는 반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드골은 1958년 6월 1일 제4공화국의 마지막 총리로 선출되었다.
드골은 곧 알제리로 날아가 군부와 이주자들에게 “당신들의 말을 알겠다”는 의미심장한 대답으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드골은 알제리 땅을 밟을 때부터 ‘프랑스의 알제리 신화’를 믿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드골은 알제리 사태 해결을 미룬 채 권력 강화를 위한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그리고 9월 28일 강력한 대통령제를 기초로 한 신헌법이 국민 80%의 찬성을 얻음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신헌법은 임기 7년의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반면 의회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드골은 1958년 12월 21일 치러진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드골은 집권 초기에는 ‘프랑스의 알제리’를 계속 유지할 것처럼 행동하다가 점차 알제리를 독립시키는 쪽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이런 드골의 의중을 뒤늦게 알아챈 알제리 주둔 프랑스 군부가 1961년 4월 22일 반란을 일으켰으나 4월 23일 밤 군복 차림으로 TV 앞에 나타난 드골이 “프랑스의 이름으로 반란자들의 행위를 저지하고 무력화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경고하자 반란군은 곧 내부 분열을 일으켜 스스로 소멸했다.
드골은 여세를 몰아 알제리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에비앙 협정(1962.3.18)을 맺고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공식 선포함으로써 프랑스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지 132년 만에 독립을 이뤘고, 드골은 용기 있게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1965년 12월에는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일관된 관심은 프랑스의 총체적인 업그레이드
드골은 대통령 재임 중에 자주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1961년 9월 파리에서 260km 떨어진 콜롱베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 길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져 대통령 전용차가 화염에 휩싸이고, 1962년 8월 엘리제궁에서 국무회의를 마치고 역시 콜롱베 자택으로 돌아갈 때도 대규모 암살 시도가 있었다. 이렇게 5~6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도 삼엄한 경비를 원치 않았다.
대통령 드골의 일관된 관심은 프랑스의 총체적인 업그레이드였다. 알제리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면서도 1960년 2월 사하라 사막에서 핵실험을 감행해 프랑스를 미국․소련․영국에 이은 세계 제4의 핵보유국으로 만들었다. 알제리 사태를 해결한 후에는 ‘강력한 유럽, 강력한 프랑스’를 주창하며 대외적으로는 서구 사회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에 반발해 1966년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에서 탈퇴했다.
대내적으로는 초고속열차 TGV, 핵발전소, 콩코드기 계획을 입안하고 화폐개혁 등 경제부흥 정책을 실천했다. 독재자란 평을 듣기도 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드골에게서 희망을 느꼈다. 침체해 있던 프랑스 자본주의가 식민지 전쟁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탈피해 고도성장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때마다 국민투표로 비판세력을 잠재우며 ‘위대한 프랑스’ 건설을 위한 강력한 정치력을 확보해 나갔다.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으로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 국민투표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잦은 국민투표는 결국 그 자신을 물러나게 한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지방행정 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국민이 국민투표로 부결한다면 이는 곧 자신에 대한 불신”이라는 극단적인 선언이 불씨가 되었다. 결국 1969년 4월 27일의 국민투표에서 52.9%의 국민이 법안에 반대하자 법적으로는 1972년까지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나 깨끗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프랑스의 영광을 끝없이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영예에는 철저하리만큼 욕심이 없었던 거인의 퇴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