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역도산 일본 프로레슬링계 석권

거구의 백인을 압도하는 모습에 일본인들의 입에서 절로 환호와 탄성이 터져나와

1938년 단오절, 김신락(1924~1963)은 큰형 항락과 함께 함경남도 용원군 고향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출전했다. 형은 우승을 하고 신락은 3위를 차지했다. 형은 워낙 이름난 씨름꾼이었기 때문에 구경꾼들은 형의 우승을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도 14살의 김신락이 3위를 차지한 것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구경꾼들 틈에는 일본 경찰이 있었고 그는 김신락에게 스모를 권했다. 김신락은 병든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형의 반대로 바로 일본으로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39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1940년 초 일본으로 건너가 그해 2월 스모계에 입문했다. 당시 김신락은 16살인데도 키 175cm, 몸무게 84kg의 당당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역도산(리키도잔)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1940년 5월 첫 시합을 치른 후 일취월장했다. 1950년 5월 요코즈나(최고급)와 오제키(2등급) 다음인 세키와케에까지 올라갔으나 민족적 차별 때문에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1950년 8월 25일 새벽 스모 선수의 상징인 마게(상투)를 자른 뒤 스모계를 떠났다. 공사판 현장감독을 하던 1951년 2월 정식으로 일본 호적을 취득하고 이름을 모모타 마쓰히로로 개명했다. 역도산은 다시 요코즈나를 꿈꾸며 스모계 복귀를 원했으나 스모계는 돌출행동으로 자주 눈 밖에 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도산이 방황하고 있던 1951년 몇 명의 미국 레슬러가 일본을 방문했다. 역도산은 우연히 술집에서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만나 프로레슬링 입문을 권유받았다. 역도산은 방일한 미국의 프로레슬러 보비 브란스를 상대로 1951년 10월 국기관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4개월 후에는 본격적인 레슬링 연마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출발에 앞서 스모의 하리테(손바닥으로 얼굴치기)와 가라테를 접목한 ‘가라테 촙’을 개발했다. 1952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간 역도산은 1년 1개월 동안 200여 회의 시합을 치르면서도 5번 밖에 지지 않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유도와 스모의 승자를 가리는 대결에서도 승리해

역도산은 전미레슬링협회(NWA)로부터 프로레슬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뒤 1953년 3월 일본으로 돌아와 그해 7월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결성했다. 월드 태그팀 챔피언인 거구의 샤프 형제도 초대해 1954년 2월 19일 일본 최초의 국제 프로레슬링 경기를 열었다. 역도산은 ‘일본 유도의 귀신’으로 불리던 기무라 마사히코와 태그매치 조를 이뤄 샤프 형제를 상대했다. 역도산이 주특기인 가라테 촙으로 2m 가까운 거구의 백인을 압도하는 모습에 일본인들의 입에서는 절로 환호와 탄성이 터져나왔다.

당시는 TV 본방송이 시작된 지 6개월밖에 안 된 때여서 사람들은 길거리 전파상에 설치된 220여 대의 TV를 보며 역도산을 응원했다. 신바시역 앞에 설치된 TV 앞에는 2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들은 길거리 TV를 보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환호하며 역도산을 응원했다. 일본의 TV 보급은 프로레슬링의 인기에 힘입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기무라가 첫판에서 패하자 사람들은 역도산이 대신 복수해주기를 원했다. 그들에게 샤프 형제는 적이었고 역도산은 적을 응징할 영웅이었다. 역도산의 가라테 촙이 동생 샤프를 난타하며 승부를 결정짓자 환성과 함성이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그러나 며칠 후 기무라가 “역도산의 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해 막 달궈지기 시작한 레슬링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무라는 역도산과 별개로 ‘국제프로레슬링단’을 설립한 뒤 “정식으로 경기를 하면 내가 역도산을 이길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역도산이 기무라의 도전을 받아들여 열린 경기는 1954년 12월 22일 1만 3,0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쿄의 국기관에서 열렸다. 기무라는 전일본유도선수권을 10년 연속 제패한 유도의 달인이었다. 양측은 이왕 경기를 벌이는 김에 경기를 제1회 일본선수권시합으로 격상하고 양측에서 4명을 더 출전시켜 일본 프로레슬링의 최강자를 가리기로 했다. 따라서 이날의 대결은 역도산과 기무라의 대결을 넘어서 양측 레슬링협회 간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으며, 유도와 스모의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대결이기도 했다.

4회전까지 역도산 측이 2승 2무의 전적을 기록, 승부는 이미 갈려 있었다. 역도산과 기무라의 마지막 결전은 소강상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무라의 왼발이 역도산의 복부를 때리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역도산이 가라테 촙으로 기무라를 무차별 난타하자 심판이 시합 속행 불가능 선언을 했다. 61분 게임은 15분 49초 만에 끝났고 기무라는 병원으로 실려가 이후 잊힌 존재가 되었다.

 

수술 잘못이 부른 39살의 어이없는 죽음

이날 이후 일본의 프로레슬링계는 사실상 역도산의 독주 체제로 굳어졌다. 악랄한 반칙 공격을 일삼는 악역들이 연이어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마다 역도산은 가라테 촙으로 그들을 물리쳐 영웅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1955년 역도산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영화 ‘노도의 사나이’가 개봉되었다. 역도산은 1956년 10월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김일을 1957년 2월 석방시켜 자신의 문하생 제1기 제자로 받아들였다.

역도산의 마지막 목표는 세계 최강 루테즈였다. 수차례의 도전에도 번번이 졌던 역도산은 1958년 8월 미국 LA에서 당시 NWA(전미레슬링협회) 챔피언인 루테즈를 마침내 쓰러뜨려 NWA 인터내셔널 선수권을 차지했다.

1963년 1월 역도산은 전격적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북한도 방문을 요청하고 있어 북한을 고향으로 둔 그로서는 민감한 방한이었다. 역도산은 판문점에서 외투와 셔츠를 벗어버리고 “형님” 하고 울부짖었다. 북에는 1942년 늦봄 고향을 방문했을 때 부부의 연을 맺은 부인과 딸이 있었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러와 프로모터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사업에서도 발군의 수완을 보였다. 1963년 6월 스튜어디스 출신의 일본 여성과 세 번째 결혼했을 때는 일본 총리를 비롯 3,000여 명의 하객이 모이고 피로연 비용만 1억 엔을 쓰는 통큰 면모를 과시했다.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아카사카의 신일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역도산은 20대 야쿠자 청년과 시비가 붙었다. 역도산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고 청년은 품속의 칼을 꺼내 역도산의 배를 찔렀다. 다행히 상처는 경미해 외과병원이 아닌 부근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단한 봉합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2월 15일 상태가 악화되어 재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 수술이 어이없게도 잘못되는 바람에 그날 오후 9시 50분 숨을 거뒀다. 39살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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