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발췌개헌’은 헌정사상 최초의 헌정 파괴 행위

6·25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52년 초, 피란지 부산에는 집권연장을 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각종 무리수로 연일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당시 정가의 최대 관심사는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과 국민이 직접 뽑는 직접선거 방식 중 어느 방식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느냐였다.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게 되어 있었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 23일까지였다.

이승만은 전쟁 중에 터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 여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국회 의석 분포 때문에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한다면 대통령에 재선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승만은 국회 간선제에 의한 재선을 단념하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해야겠다고 작심했다. 그래서 1951년 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1952년 1월 18일의 국회 표결에서 찬성 19, 반대 143으로 간단하게 부결되어 망신만 당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이승만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끝난 후인 1952년 2월 5일 “국회의원이 민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유권자가 국회의원을 소환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종 유령 단체들이 국회 해산과 야당 의원 소환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연일 부산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야당 의원들을 겨냥해 ‘민의를 거역하는 매국노들은 민중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공갈 협박성 벽보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고 삐라가 뿌려졌다.

데모대는 ‘땃벌떼’, ‘백골단’이라고 붉은 글씨로 쓴 수건을 이마에 동여매고 어깨에는 구호가 적힌 띠를 걸친 모습으로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경남도청 구내 무덕관 앞뜰까지 들어가 의사당을 포위하고 연좌데모를 벌였다.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는 원외 자유당 지방당이 주동이 되어 ‘배신 국회의원 규탄대회’를 열고 직선제 개헌 지지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국회에는 야당이 국회에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이를 봉쇄하기 위해 정부가 별도로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등 2개의 개헌안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1952년 4월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재적의원 3분의 2를 넘긴 123명의 명의로 제출되자 대통령중심제에 상하 양원제를 양념으로 끼워넣은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도 같은 달 제출되었다.

 

‘우의․마의(牛意․馬意)’ 해학성 조어 등장해

그 무렵 장택상 부의장이 ‘개헌 4개 원칙’에 입각한 제3의 개헌안을 들고 나왔다. 개헌 4개 원칙이란 개헌 원칙적 찬성, 개헌안 상정 시기 재고, 개헌 내용 재검토, 대통령과 국무총리 인선 사전 합의 등이었다. 장택상은 곧 20여 명의 의원을 규합, 이것을 모체로 ‘신라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발족함으로써 캐스팅 보트를 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묘하게도 장면 총리가 4월 20일 사표를 제출하자 후임으로 장택상 부의장이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원외 자유당이 4월 25일의 시․읍․면의원 선거와 5월 10일의 도의원 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이승만을 고무시켰다. 4월 24일에는 서민호 의원의 총격사건이 발생해 이승만에게 더욱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었다.

총격 사건은 지방의회 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간 서민호 의원이 술에 취한 대위가 총을 쏘는 것에 응사하다가 대위가 죽어 살인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국회는 “정당방위인데도 서 의원을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며 서 의원 석방 결의안을 의결했다.

5월 19일 서 의원이 석방되자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이 연일 난동을 부리면서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 이들 관제 데모대가 우마차를 타고 상경했다고해서 생겨난 해학성 조어가 ‘우의․마의(牛意․馬意)’다. 이승만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국 수습을 명분으로 삼아 대구의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에게 부산으로 군대를 파견하라고 긴급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총장은 “전시 중 유엔군의 허가 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며 파병을 거부했다.

이 대통령이 대타로 내세운 인물은 자신의 충복인 원용덕 헌병대 사령관이었다. 이승만이 공비 출몰을 구실로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은 물론 경남과 전남․북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것은 부산정치파동의 서막이자 장기 독재의 신호탄이었다. 계엄 발령에 앞서 5월 24일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던 족청계의 이범석을 내무장관으로 기용하고 서북청년단 출신을 치안국장으로 임명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정체 모를 단체들이 연일 난동 부리며 국회 해산 요구

5월 26일에는 우리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에 정헌주 등 3명의 의원이 구속된 데 이어 47명의 국회의원을 태운 출근버스가 의사당 정문인 경남도청 정문에서 헌병의 불심검문을 거부하다 군용 크레인에 달려 헌병대로 끌려간 것이다. 47명의 의원 중 몇몇 의원은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직선제 개헌안을 반대하는 몇몇 의원은 또 다른 이유로 구속되었다. 이렇게 구속된 의원은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국회는 5월 27일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고 28일 국회의원 석방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정부는 구속 의원들이 현행범이라는 이유로 석방을 거부했다. 김성수 부통령은 이에 격분, 부통령직을 사임(5.29)했다. 6월 20일 각계 중진 77명이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진행하던 ‘입법부 수호 및 호헌 구국선언대회’도 정체 모를 괴한들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일부 의원은 타박상을 입었고 조병옥의 얼굴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이런 가운데 장택상 국무총리가 주도하는 신라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가 1개월밖에 남지 않은 1952년 6월 21일 제3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양원제 개헌안과 국회의 내각책임제 개헌안 가운데 좋은 점만을 발췌했다 해서 붙여진 ‘발췌개헌안’이었다. 신라회가 회유와 협박을 섞어가며 발췌개헌안에 찬성 날인을 받은 결과 원외 자유당 63명, 신라회 20명, 원내 자유당 19명 등 재적의원 3분의 2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 개헌안은 국회에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을 뿐 내용은 정부 측 개헌안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발췌개헌안을 표결하려면 30일간의 공고 기일이 필요했으나 이승만의 임기 종료가 다가와 초조해진 정부는 이미 공고된 2개의 개헌을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공고할 필요가 없다는 억지를 부려 표결을 서둘렀다. 그런 가운데 6월 25일 발생한 ‘이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 일부 야당 의원이 범인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배후세력으로 밝혀져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이승만, 후보 등록 때까지 ‘번의 쇼’ 벌여

이승만은 발췌개헌안 통과를 위해 다양한 카드를 동원했다. 구속된 야당 의원들을 석방해 협조를 요청하는가 하면 경찰을 의원들 자택으로 보내 의회 참석을 종용했다. 그 결과 의사당 문이 봉쇄되고 군경들이 삼엄한 감시를 펼치는 가운데 7월 4일 밤 치러진 찬반 투표 결과 163명 찬성, 기권 3명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정부는 7월 28일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그동안 국제공산당에 관련된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야당 의원들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로써 극도의 불안과 긴장을 조성했던 부산정치파동도 막을 내렸다.

그런데 8월 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말해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승만의 불출마 성명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민중자결단의 조작된 민의 시위가 재연되었다. 유령 단체들은 대통령 임시관저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며 출마를 간청했다. 지방의 시·읍·면 의회는 이승만의 재출마를 간청하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이승만이 입후보 마감일인 7월 26일 측근을 시켜 입후보 등록을 마쳤을 때 ‘번의(翻意) 쇼’로 국민을 우롱했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는 이승만·이시영·신흥우·조봉암 등 4명, 부통령에는 이범석·이갑성·조병옥 등 9명이 출마했다. 투표 결과 이승만은 총 703만 표 중 523만 표(74.6%)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조봉암은 79만, 이시영은 76만, 신흥우는 21만 표를 얻고, 부통령에는 294만 표를 얻은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발췌개헌은 이승만이 재집권을 위해 무리하게 통과시킨 헌정사상 최초의 헌정 파괴 행위였으며 전시독재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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