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9월 총파업과 대구 폭동

“테러는 테러, 피는 피로 갚자”는 ‘신전술’ 들고나와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그동안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주시해오던 미 군정이 칼을 빼들었다. 위조지폐를 발행해 온 조선정판사를 5월 7일 급습한 것을 신호탄으로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시키고 38선의 무허가 월경을 금지했다. 조선공산당은 미 군정의 이러한 조치를 분단의 영구화, 좌익의 분열과 조선공산당의 고립화, 단독정부 수립 음모라며 반발했다.

그래도 미 군정이 일부 노동자들의 파업을 단호하게 진압하고 좌익계의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산하 노동조합을 부인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자 폭력에 호소하는 새로운 전술을 들고 나왔다. “테러는 테러, 피는 피로 갚자”는 신전술이었다.

조선공산당이 전평을 전면에 내세워 총파업을 예정한 시기는 10월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 운수부가 적자 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의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고 발표하자 총파업 시기를 9월로 앞당겼다. 부산철도 노조가 미 군정 운수부를 상대로 임금 인상 등 6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1주일간의 시한부 총파업을 예고한 것은 9월 16일이었다. 미 군정이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9월 23일 0시를 기해 7,0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9월 24일 전국으로 확대되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9월 총파업’으로 전개되었다.

파업에는 서울 지역 노동자 3,700여 명을 포함해 전국 철도노동조합 18개 지부 4만 여명이 참가했다. 전국의 수송망이 마비된 가운데 9월 25일에는 경성출판노조, 26일엔 경성전철 노조가 동조파업에 돌입함으로써 파업은 각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던 중 9월 30일 새벽, 파업 중인 용산철도 기관구를 둘러싸고 8시간 동안 전개된 전평과 우익 간의 공방전이 우익의 승리로 끝나 1,700여 명의 파업 가담자들이 검거되고 경전과 총파업본부가 설치된 영등포의 조선피혁공장이 우익에 점령되면서 총파업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대구 폭동은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 투쟁

그러나 10월 1일 대구에서 불을 지핀 ’10월 폭동’으로 전국은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진통이었다. 당시 북한의 소련 군정청 총사령관인 스티코프도 9월 총파업 때와 10월 폭동 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해 남한의 혼란을 부추기는 데 혈안이었다.

1946년 9월의 대구는 해방 후 계속되는 고질적인 식량난과 1,200여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콜레라 만연, 여기에 미 군정에 대한 불만까지 겹치면서 민심이 흉흉했다. 이럴 때 내려진 전평의 ‘9월 총파업’ 결정은 건초 더미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9월 24일 대구역 철도 노동자 1,000여 명이 시작한 파업을 신호탄으로 26일 대구 우편국 직원을 비롯해 3개 공장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에 돌입하면서 파업은 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출판노조 소속 신문사 노조원들도 27일 일손을 놓기 시작해 29일 파업을 벌이고 30일에는 신문 제작을 거부했다. 이에 고무된 전평 대구지방평의회는 27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대구투위)’ 현판을 정식으로 내걸었다.

파업 노동자들의 기세가 한층 고조되던 10월 1일 “시청에 가면 쌀을 준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1,000여 명의 부녀자가 아침부터 대구시청으로 몰려들었다. 비슷한 시각 ‘대구투위’ 현판을 떼려는 경찰과 이를 막으려는 전평 간부들 사이에 옥신각신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를 본 일반 시민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후 들어 군중이 늘어나면서 시위 장소는 시내 중심가로 바뀌었고 학생과 노동자가 주축을 이룬 시위대는 어느덧 7,000여 명을 헤아렸다.

시위대가 태평로 일대와 대구역 광장을 가득 메운 채 구호를 외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경찰은 밤 11시쯤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 와중에 시위를 하던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는 이튿날인 10월 2일 아침 재개되었다. 대구 소재 3개대 대학생들은 경찰 발포로 사망한 노동자의 사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이 노동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며 대구경찰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전 10시경 3개 대학 학생들과 중학생 수천 명이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발포 중지, 무장해제, 체포자 석방을 요구했다. 노동자와 시민이 가세해 차도를 막고 연좌데모를 벌였을 때 시위대는 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정오를 지날 무렵 시위대에서 던진 돌이 한 경찰관의 얼굴에 맞았다. 그 순간 경찰관이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다른 경찰관들도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박정희 형 박상희도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피살

흥분한 군중은 대구경찰서 안으로 돌진해 유치장을 부수고 100여 명을 석방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달아나다 붙잡힌 경찰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박헌영이 쓴 ’10월 인민항쟁’에 따르면 이때의 총격으로 18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노동자의 보복 총격으로 경찰관도 4명이 사망했다. 시위 군중은 뒤이어 도지사 관저와 파출소를 습격하고 공무원을 살해하거나 공무원 가족을 구타했다.

미군 진압부대가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오후 3시쯤 2대의 탱크까지 투입해 적극적으로 해산작전에 나섰다. 미 군정은 저녁 6시를 기해 대구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좌익 시위대는 곧 자취를 감추었고 군중은 해산했다. 그러나 여파는 3일부터 대구를 벗어나 인근 읍면으로 번졌다.

미군의 G-2(정보기관)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 영천군에서는 경찰관이 15명 살해되고 46명이 실종되었으며 우체국이 전소되었다. 경찰 무기고, 법원 등 많은 공공기관과 가옥도 불에 탔다. 칠곡군에서도 다수의 공공건물이 파괴되었다. 특히 선산군의 봉기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대구에서 내려온 지원 인력이 선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박정희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그의 형 박상희가 활약한 게 선산군 봉기였기 때문이다. 박상희는 10월 6일 오전 도주하다가 사살되었다. 동료들의 참극을 목격한 경찰과 우익 청년들의 반격은 가혹한 앙갚음으로 나타났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에서만 경찰과 지원병력을 포함해 80명이 사망하고 145명이 행방불명 및 납치되었으며 96명이 다쳤다. 시위대 피해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이고 우익 민간인 사상자 수는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으로 집계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폭동은 경북·경남 등 영남지방에 이어 전남·북, 경기, 충청, 강원 등 남한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12월 초순까지 전국의 73개 시․군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연인원 230만 명이 들고 일어나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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