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미·소군 진주와 남북 분단

 분단의 기원은 1943년 카이로 회담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에 각각 별개의 정권을 세워 남북은 분단국이 되었다. 분단의 기원은 1943년 11월 27일 회담을 시작해 12월 1일 발표한 ‘카이로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 3대 강국은 “조선 인민들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를 거쳐 조선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한반도가 독립된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연합국이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최초의 국제공약이고 일본의 여러 식민지 가운데 유독 조선만 언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선을 어떤 식으로 독립시킬 것인지는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문서로 합의하지 않고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구두로만 언급해 공식적으로는 공표되지 않았지만 신탁통치가 논의되었다는 점에서 한민족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회담이었다. 루스벨트가 “미․영․소 3국이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하고 스탈린이 원칙적으로 찬동함으로써 신탁통치안은 조선의 운명으로 다가왔다.

당시 루스벨트의 관심은 소련을 대일전에 참전시켜 미군의 희생을 줄이고 전쟁을 빨리 승리로 끝내는 데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후 조선과 아무런 인연이 없던 미국의 눈에 조선은 소련의 확장을 막는 데 필요한 방패막이고 한낱 피지배 민족일 뿐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죽었다고 해서 미국의 조선 정책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후임 대통령 트루먼 역시 조선에 대한 미·영·소·중 4개국의 신탁통치를 지지했다.

스탈린 역시 장차 한반도 전체를 소비에트화할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서도 미소 양국 정상이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을 재확인함으로써 신탁통치안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포츠담 회담 무렵 38선 사실상 획정돼

38선은 어떻게 획정된 것일까. 소련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만주로 쳐들어갔다. 조속한 종전을 위해 오래전부터 소련의 대일 참전을 요청해온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참전을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일본의 항복 시점을 정확히 예상했더라면 소련에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겠지만 원자폭탄은 7월에야 개발되었고 8월 초에야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원했던 참전이지만 막상 소련이 속전속결로 남하하자 미국으로서는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었다. 소련이 일본까지야 넘보지는 않겠지만 한반도가 문제였다. 막연히 4개국 신탁통치안을 합의만 했지 구체적인 세부 조항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초조해진 미국은 소련의 남하 저지선이 필요했다. 검토는 전쟁부 작전국 산하 정책전략단 소속 실무급 대령들에게 맡겨졌다. 딘 러스크 대령과 찰스 본스틸 대령 등 실무자들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 지도 위에 38선을 남북 경계선으로 그은 것은 8월 11일 새벽이었다.

이것이 38선 획정을 둘러싼 국내 학계의 정설이라면 다른 주장도 있다. 미국이 즉흥적으로 38선을 획정한 것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포츠담에서 미 전쟁부 작전국장 존 헐 중장이 38선을 획정했다는 것이다. 근거는 러스크 대령의 상관인 존 헐 중장이 1949년 6월 미군 관계자 해리스 대령과 전화로 한 인터뷰 녹취록이다.

헐은 포츠담 회담 당시를 회고하는 이 인터뷰에서 “38선은 포츠담에서 마련되었다”면서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고,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작전국 최고책임자이던 헐 중장의 지시가 지휘 계통을 따라 실무자에게 하달되어 8월 11일 38선이 최종 획정되었다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38선을 승인하자 8월 11일 미 태령양사령부가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급전을 보냈다. 소련군은 어느새 한반도까지 밀고 내려와 8월 9일에는 경흥, 10일에는 함흥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한반도에서 무려 1,6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24군단에 “38도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임무가 내려진 것은 단지 다른 부대에 비해 한반도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미 하지 중장, 식민지 경험한 조선인의 고민 뭔지 몰라

24군단이 아직 한반도에 도착도 하기 전에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부랴부랴 38도선을 경계로 남에서는 미군이 북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는다는 ‘일반명령 제1호’를 스탈린에게 통고했다. 스탈린이 이의를 달지 않음으로써 38도선은 남북의 경계선으로 확정되었다. 만일 소련 군대가 일반명령 제1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하했다면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조선의 최남단까지 장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련으로서는 세계 유일의 원자탄 보유국인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미국이 일본의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영유를 소련에 허용한 마당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38선은 미소 양국의 군사편의주의의 산물이었다. 소련의 제1극동방면군 제25군은 웅기․원산․나진(8.15)을 거쳐 나남(8.17)을 점령한 뒤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제25군 총사령관은 치스차코프 대장이었으나 실권자는 연해주 군사위원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존 하지의 24군단은 9월 8일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 그에 앞서 9월 2일에는 ‘남한 민중 각위에게 고함’이라는 하지 중장의 포고문이 서울 상공에 뿌려졌다. 하지가 도착하기 전,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에게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려 미군 상륙 전까지 치안 유지 권한을 위임받았다.

새로 진주한 미군은, 한국인으로서는 실로 40년 만에 맞은 해방군이었다. 여운형이 보낸 건준 대표와 조병옥․정일형 등 한민당계가 출영했지만 이들에게는 대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질서 유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으로부터 날아든 총탄이 한국인들을 쓰러뜨렸다. 해방군의 입성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 가운데 2명을 현장에서 실수로 사살한 것이다.

 

미군의 포고는 멋대가리 없고 위압적, 소련군 포고문의 수사는 화끈

하지는 9월 9일 일본군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계획은 백지상태였다. 하지는 과달카날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군인 중의 군인’, ‘태평양의 패튼 장군’이라고 불렸으나 주변에는 조선 문제 전문가는 물론이고 조선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미국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식민지를 경험한 조선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구체적인 정책도 수립하지 못했다.

맥아더는 9월 9일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 제1호, 2호, 3호를 발표했다. 1호에는 “9일부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고 씌어 있었고, 2호에는 “연합군에 적의 있는 행위를 한 자는 재판을 통해 사형 혹은 그 법정이 결정하는 기타의 처벌을 당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처럼 미군의 포고문에는 남한 내의 소요만을 우려해 관례적인 법규만을 강조하다 보니 조선인이 느끼고 있는 해방의 감격과 희열에 공감하는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멋대가리도 없었고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반면 소련군 포고문의 수사는 화끈했다. 8월 20일자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로 시작해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로 끝을 맺었다. 소련의 복심까지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도 소련이 ‘38선 저쪽’에 숨어 있다 보니 남쪽에서는 소련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소련은 남쪽에서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에만 존재한데 비해 점령자 미국은 ‘38선 이쪽’에서 우리가 직접 체험하게 되는 ‘일상의 세계’, 혼란스러운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다보니 미군은 일방적으로 덤터기를 써야 했다. 스탈린의 진짜 속내도 1991년 소련 붕괴 후에야 밝혀져 그동안은 1946년 6월 정읍 발언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만이 ‘분단의 원흉’으로 지목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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