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영옥 미 장교로 2차대전 참전

미국을 대표하는 전쟁 영웅 16명 중 한 명으로 선정

미국의 유명 포털사이트 ‘msn.com’이 2011년 6월 미국을 대표하는 전쟁 영웅 16명을 선정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2차대전 승리의 주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더글러스 맥아더 등 그야말로 영웅 일색이었다. 그런데 영웅 명단에 ‘Young-Oak Kim’이라는 낯선 이름도 눈에 띄었다. 유색 인종으로는 유일하게 전쟁 영웅에 포함된 한국계 김영옥(1919~2005)이었다.

김영옥은 미국 LA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나 로스엔젤레스 시립대를 중퇴했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아시아계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미국도 점차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연방의회가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포함시키는 법을 제정함에 따라 김영옥도 1941년 1월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장교가 부족해지자 보병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되었다. 1942년 11월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보병장교학교에 입교했을 때 동기생 가운데 유색인은 김영옥 혼자였다.

김영옥은 장교 교육을 마치고 1943년 1월 말 미시시피주의 ‘셸비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100대대에 배속되었다. 100대대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후 하와이 내 일본인 2세들로만 편성된 독특한 부대였다. 100대대는 훈련을 마치고 1943년 8월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오랑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34사단 133연대에 배속되어 그해 9월 이탈리아 전투에 참가했다.

김영옥은 100대대에서 한국계라는 이유로 일본계 사병들로부터 한동안 따돌림을 당했으나 용감하게 전투를 벌여 곧 부대원의 신뢰를 얻었다. 1943년 11월에는 이탈리아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탄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이때 첫 번째 ‘퍼플 하트’를 받아 이후 계속될 훈장 행진을 시작했다. ‘퍼플 하트’는 전투 중 경상이든 중상이든 피를 흘린 군인에게 무조건 1개씩 병원장이 직권으로 주는 훈장이다. 전투 후 일본인 사병들은 김영옥을 ‘사무라이 김’으로 불렀다. 김영옥의 아내는 남편의 부상 소식을 미국에서 전해 듣고 간호장교로 지원해 영국 런던의 야전병원에서 근무했다. 아내의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중국인이었다.

 

“김영옥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 퍼져

100대대는 1944년 1월부터 2월까지 2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된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크게 패해 병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100대대는 ‘퍼플 하트 대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100대대원들 사이에는 “김영옥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이 퍼져 나갔다. 김영옥은 1944년 2월 미국에서 세 번째 높은 무공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 무렵 연합군은 로마 해방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를 해방하려면 독일군이 정예 탱크사단을 어디에 배치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김영옥은 1944년 5월 16일 일본계 사병 1명만 데리고 심야에 적진에 침투해 2명의 독일군을 생포해 끌고 왔다. 연합군은 그가 잡아온 포로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5월 23일 ‘버펄로 작전’이라는 총공격을 개시해 6월 4일 로마를 점령했다.

로마 입성 후 마크 클라크 사령관은 김영옥에게 두 번째로 높은 특별무공훈장을 수여하면서 즉석에서 자기 부관의 계급장을 떼 김영옥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 해방 후 김영옥에게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가 2차대전이 끝난 뒤 공훈 심사를 다시 해 최고 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김영옥이 이끄는 부대는 로마 해방 3개월 후 벌어진 피사 해방전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김영옥의 부대는 1944년 10월 프랑스 동북부 보주산맥의 작은 마을 브뤼에르와 비퐁텐 지역에 투입되었다. 보주산맥을 넘으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곧바로 독일이었기 때문에 독일 역시 이 방어선을 지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김영옥은 기관총탄 세 발을 맞는 큰 부상을 겪으며 그 지역을 해방한 주역으로 활약했다. 프랑스 정부는 십자무공훈장으로 감사와 위로를 표시했다가 2005년 공적을 재평가해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했다.

김영옥은 전쟁이 사실상 끝나갈 무렵인 1945년 4월 휴가차 LA로 돌아왔다. 그때 그와 어머니가 만나는 사진이 ‘전쟁 영웅의 귀환’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LA타임스에 큼지막하게 실렸다. 김영옥은 휴가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종전 소식을 듣고 미국에 그대로 있다가 1946년 전역 후 LA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다.

 

미군 역사상 첫 아시아계 대대장 부임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김영옥은 부모 나라를 위해 1950년 9월 자원입대했다. 1951년 3월 동부전선에 투입된 그는 정식 대대장은 아니었지만 5월 23일부터 사실상 대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31연대 1대대를 맡았을 때 병사들 사이에는 패배감이 만연해 있었다. 함경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만나 궤멸되다시피 해 중공군에 대한 공포감이 컸던 것이다. 김영옥은 먼저 구만산 전투와 탑골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부대원에게 승리감을 맛보게 했다. 이 전투 승리로 두 번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1대대는 연전연승하며 무적의 부대로 떠올랐다. 5월 27일 유엔군이 전 전선에서 38선을 다시 넘었을 때도 그의 대대는 선두로 돌파했다. 북진 당시 다른 부대와 같은 선상에 있던 그의 대대는 1주일 만에 북쪽으로 삐죽이 올라가더니 다시 1주일 뒤에는 북으로 60km나 솟아오른 중부전선의 맨 앞에까지 진격해 있었다. 이후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결국 오늘날 휴전선 모양이 되었다.

당시 그의 부대는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아군으로부터 오인 포격을 받기도 했다. 김영옥은 오인 포격으로 중상을 당해 일본으로 후송되었으나 다리 절단의 위기를 넘기고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8월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다. 1951년 9월 소령으로 진급하고 10월 정식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공식적인 대대장 부임은 미군 역사상 첫 아시아계 대대장이었다는 점에서 미군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총알과 파편이 헤집어놓은 그의 몸은 모두 11군데나 신경이 절단된 상태였다. 2차대전 때 손가락 일부를 잃고 6·25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그가 받은 수술만 40여 차례나 되었다. 그와 그의 대대는 전쟁 중에도 서울 용산에 있는 고아원을 정기적으로 지원해 수백 명의 고아를 돌보기도 했다. 김영옥은 1952년 9월 한국을 떠났다가 1963년 다시 방한해 1965년까지 군사고문으로 활약했다. 이후 유럽과 하와이 등에서 근무하다 197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2차대전 때 일본군계 부대를 지휘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재미 일본계 참전군인협회장(1989~2004)으로 활동했다. 미국의 일본계 교육재단은 그의 일대기를 담은 ‘잊혀진 용맹’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LA 등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김영옥은 2006년 우리나라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음으로써 프랑스, 이탈리아, 한국 등 3개국으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유일한 한국계 인물이 되었다.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도 특별무공훈장 1개, 은성무공훈장 2개, 공로무공훈장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전상훈장 3개 등 10개가 넘었다.

2009년 LA 한인타운에 그의 이름을 딴 ‘김영옥 중학교’가 세워지고 2010년 한국 정부가 외국에 처음 설립한 재외동포 연구소인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가 미국 캘리포니아대(UCR)에서 문을 열었다. 2011년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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