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노기남 한국인 첫 주교 서품

격동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잡은 초석이자 생생한 목격자

노기남(1901~1984) 신부는 일제 하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임명되어 1967년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격동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잡은 초석이자 우리 현대사의 생생한 목격자였다. 노기남은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의 11남매 중 막내로 평북 평양에서 태어났다. 서당 공부를 하던 그가 프랑스 신부가 운영하는 서울 원효로의 성심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6세 때인 1917년 9월이었다. 노기남은 12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30년 10월 26일 사제로 서품되는 동시에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그는 동기 신부들이 몇 년 동안 보좌신부를 하다가 주임신부가 되는 것과 달리 1942년까지 12년 동안 보좌신부로 봉직하며 천주교 내 각종 단체 활동을 병행했다.

당시는 신사참배 강요 등 일제의 종교 탄압이 노골화될 때였다. 조선 천주교회가 신사참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1936년 5월 로마 교황청이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고 훈령을 내려 국내 천주교계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이후 조선 천주교는 성직자와 신도의 신사참배를 허용한 것은 물론 일제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미사를 거행하고 국방헌금을 걷었으며 신도를 상대로 시국강연도 했다.

노기남 보좌신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40년 11월부터는 일제가 제정한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해 설립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산하 천주교 경성대목구(代牧區)연맹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대목구란 임시 교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치된 후 1911년 서울과 대구가 대목구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 초까지 원산, 연길(간도), 평양, 함흥, 춘천, 부산, 광주, 전주, 청주, 대전, 인천 등 모두 13곳에 대목구를 두었다.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천주교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조선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대목구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 일환으로 평양의 대목구와 춘천·광주의 지목구(知牧區·대목구보다 작은 준교구)에서 사목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체포·구금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출신의 라리보(한국명 원형근) 경성대목구장은 일제가 경성대목구에까지 손을 뻗치기 전 미리 조선인을 대목구장으로 임명해야 일본인을 대목구장으로 세우려는 일제의 계략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라리보가 염두에 둔 인물은 12년 동안 종현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대목구장인 자신을 보좌해 경성대목구의 전반적인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는 노기남이었다.

라리보는 로마 교황청에 노기남을 경성대목구장으로 임명해줄 것을 비밀리에 요청했다. 로마 교황청은 노기남을 경성대목구장 겸 평양대목구장·춘천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했다. 노기남은 예상치 못한 교황의 결정을 완강하게 사양했으나 라리보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라틴어로 “피아트 볼룬타스 투아(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되뇌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노기남은 1942년 1월 18일 경성 대목구장 서리에 착좌하고 1942년 11월 10일 경성대목구장으로 정식 임명되어 12월 20일 취임했다. 이로써 그는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래 한국인 최초이자 조선 천주교의 10번째 경성대목구장이 되었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되뇌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여

해방 후에는 미군정, 우익 정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미 군정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이른바 ‘노기남 메모랜덤’이라는 정부 보직 적격자 명단을 미 군정에 제출해 미 군정의 원활한 통치도 뒷받침했다. 신학교 시절 잠시 그를 가르친 장면에게는 1946년 2월 미 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입법기관인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천주교 대표로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1948년 5월의 첫 총선거 때도 출마를 권유해 장면은 서울 종로을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6 10월에는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던 조선정판사를 불하받아 경향신문을 설립하고 10월 6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경향신문은 처음 3만 부를 찍었으나 한 달도 안 되어 발행부수가 5만 부를 넘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경향신문은 사시로 시시비비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반공지를 자임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반공과 친미를 공유하는 이승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교황 비오 12세 알현을 위해 로마 교황청을 방문할 때 일어난 6․25 전쟁 때는 주불대사 교체로 공백 상태가 된 주불대사관에서 사실상 대사 역할을 하며 우방국의 참전을 끌어냈다. 1950년 9월 귀국 후에는 “신자여! 멸공에 총궐기하라”며 천주교 신자들에게 반공 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순교 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회는 종교단체이면서 강력한 반공단체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6·25 전쟁기까지 일관되게 취한 반공, 친미, 친이승만, 친유엔 태도는 천주교회의 중립적이고 초월적 태도를 약화시키고 정치 이슈에 민감한 단체로 만들었다. 다만 친이승만적 태도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기점으로 장면과 이승만의 사이가 틀어진 후 반이승만으로 태도가 바뀌었다. 이승만 역시 노기남뿐만 아니라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로마 교황청에 “노기남은 정치 주교이니 갈아치우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치에 너무 관심을 쓰지 말라”는 충고를 들어야 했다.

한국 천주교에 1962년 3월 24일은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고 같은 날 서울, 대구, 광주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노기남(서울), 서정길(대구), 헤럴드 헨리(광주)도 대주교로 승품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노기남은 1967년 3월 서울대교구장 직을 비롯한 모든 천주교 요직을 내려놓은 뒤 성 라자로 마을에서 기거하다가 1984년 6월 25일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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