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태평양함대의 모항이던 진주만은 2시간 만에 초토화 돼
1940년 7월에 출범한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겨냥한 곳은 동남아였다. 일본은 먼저 독일의 괴뢰 정부인 프랑스의 ‘비시 정부’를 압박해 프랑스의 식민지인 북부 인도차이나에 비행 기지를 건설했다. 중일전쟁의 상대국인 중국이 외부 세계로 통하는 ‘버마 로드’를 폭격하기 위해서였다. 버마 로드를 통해 중국의 장개석 정부에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던 미국은 그해 9월 26일 일본에 비행기 원료, 고철, 강철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일본은 이에맞서 9월 27일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해 추축국의 일원이 되고 1941년 4월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7월부터는 프랑스 ‘비시 정부’의 식민지인 남부 인도차이나를 공략했다. 비시 정부의 프랑스군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일본에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빼앗겼다. 당시 일본의 계획은 동남아시아를 먼저 점령한 후 그 지역을 굳게 방어하면서 자원을 확보하고 독일의 승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독일·이탈리아가 영국을 굴복시킨다면 일본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에 확보한 자국의 세력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심산이었다.
미국은 이런 일본에 대해 1941년 7월 25일 미국 내 일본인의 자산을 동결하고 8월 2일 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했다. 당시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치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미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거나 아니며 타협해야 했다. 이도저도 아니면 2년 이내에 저절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미일 양국의 국력을 비교하면 일본의 국민총생산이 대략 90억 달러인 데 비해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일본의 12배인 1,100억 달러나 되었다. 철강은 20배, 석탄은 10배, 전력은 6배의 격차를 보였다. 특히 전쟁의 필수품인 석유 부문에서 미국의 비축량 14억 배럴은 일본의 700배에 달했다. 이 때문에 개전 시 미국과 직접 부딪쳐 싸워야 하는 해군으로서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반면 중국에서의 승리에 기고만장한 육군은 전쟁 불사를 각오했다.
고노에 총리는 1941년 7월 제3차 고노에 내각을 구성한 뒤, 양국 간 정상회담을 타진했으나 미국은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10월 17일 고노에 내각이 사퇴하고 군인 출신의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함으로써 일본은 군부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도조 내각은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 외교 교섭과 전쟁 준비를 동시에 진행하되 11월 말을 미국과의 외교 교섭 시한으로 정했다.
일본, 미국과 전쟁 벌여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려
양국 간 몇 차례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던 11월 26일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이 일본에 대일각서를 전달했다. 이른바 ‘헐 노트’로 불린 각서는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무조건 철수, 3국 동맹 파기 등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헐 노트’를 미국의 최후 통첩으로 판단한 일본은 1941년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 마침내 개전을 결정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길을 선택했다.
태평양전쟁은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49분(워싱턴 시간은 오후 1시 19분, 일본 시간은 8일 오전 3시 49분), 180여 기의 일본 항공기가 하와이제도 오아후섬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다. 폭격에 가담한 후치다 마쓰오 중령은 오아후섬 북쪽 320km 지점의 항공모함 아카기호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 특별기동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에게 폭격 개시 4분 후 작전 성공을 알리는 암호 “도라! 도라! 도라!”를 타전했다. 오전 8시 54분 시작된 일본군의 2차 폭격으로 미 태평양함대의 모항이던 진주만은 2시간 만에 초토화되었다.
진주만을 기습하기 위한 일본의 기동함대는 410여 기의 항공기를 탑재한 항공모함(6척), 전함(2척), 중순양함(2척), 구축함(9척), 잠수함(3척) 등으로 편성되었다. 이 기동함대가 쿠릴열도 에토로후섬을 출발해 하와이섬으로 향한 것은 1941년 11월 26일이었다. 기동함대가 조용히 북태평양 항로를 통과해 12월 7일 오전 하와이 근해에 닻을 내리고 있을 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군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인도차이나 해역에서 태연히 기동훈련을 펼쳤다.
미국은 이미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해 공격 징후는 알고 있었으나 공격지점까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진주만, 파나마, 샌프란시스코, 필리핀 등에 “일본의 중대 조치가 있으니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고 타전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기습을 막지 못했다. 당시 하와이에는 5만 9,000명의 미 지상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전함 8척, 구축함 54척, 잠수함 22척 등 수십 척의 해군 선박이 기항하고 있었다.
오전 9시 45분까지 계속된 일본군의 폭격으로 전함 애리조나호, 캘리포니아호 등 4척, 중순양함 1척, 유조선 2척 등이 침몰했으며 메릴랜드호, 테네시호 등 전함 4척과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3척, 유조선 3척 등은 대파되었다. 300~400기의 비행기가 파괴되고 모두 2,388명이 전사했다. 반면 일본은 29기가 귀환하지 못하고 64명의 전사자만 냈을 뿐 피해가 미미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 캐치프레이즈로 미국인 단결
일본은 미 태평양함대의 주력함 대부분을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군이 입은 피해는 일본의 생각처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우선 항공모함이 진주만에 1척도 없었고, 또 대파된 군함도 일부를 제외하곤 다시 수리되어 나중에 사이판,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 해전에서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했다. 특히 일본의 2년치 보유량에 해당하는 450만 배럴의 석유가 비축되어 있는 중유 저장탱크, 선박 수리시설, 잠수함 기지 등을 거의 파괴하지 못한 것은 일본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미 해군이 비교적 신속하게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연료탱크나 선박 수리시설 등이 온전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하고 1시간이 지나서야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대사를 통해 미 국무성에 대미각서를 제출한 것에 특히 분노했다. 애초에 일본은 선전포고용의 대미각서를 진주만 기습 예정 시간 20분 전인 12월 7일 오후 1시경(워싱턴 시간)에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암호문으로 전송한 각서를 일본 대사관 직원이 늦게 정식 문서로 만드는 바람에 실제 공격이 개시된 후 1시간가량이 지난 오후 2시 20분경에야 미국에 전달했다. 그때 하와이 시간은 오전 8시 50분으로 진주만은 이미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대미각서는 전쟁에 대한 의사 표시가 없어 선전포고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개전 후 미국인들은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하나가 되었다. “기억하라!” 캐치프레이즈는 1836년 멕시코와의 전쟁 때 “알라모를 기억하라!”,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때 “메인호를 기억하라!”에서 보듯 이미 미국인을 하나로 단결시킨 전례가 있었다. 12월 8일 미국이 저넷 랭킨 의원 단 한 명을 빼고 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선전포고를 가결함으로써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