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신용욱 조선항공공업사 설립

우리나라 항공수송 산업의 개척자

신용욱(1901~1962)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항공수송 산업의 개척자였다. 그는 전북 고창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비행 유학을 떠났다. 1922년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1등 비행사 면허를 따고 동아항공전문학교를 졸업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비행사가 되었다.

귀국 후, 사재를 들여 여의도에 조선비행학교 교사를 신축하고 미국에서 신형 비행기 1대를 들여와 1930년 5월 조선비행학교를 개교했다. 일본에서도 4인승 쌍엽기를 들여와 1930년 9월부터 서울 상공을 일주하거나 서울∼인천 간을 왕복하는 유람 비행 사업을 시작했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해 1933년 미국에서 헬리콥터 조종까지 배우고 돌아와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비행사로 각광받았다.

1934년에는 그해 1월 1일 조선일보가 언론사 최초로 구입한 전용 비행기의 촉탁 조종사가 되어 1년 반 동안 전국의 상공을 누비며 취재를 지원했다. 1934년 7월 악천후 속에서 충청, 전라, 경상 삼남 지역을 물바다로 만든 수재 현장을 취재하는 비행기를 몰고 가 신문에 생생한 사진이 실리도록 했으며 8월 11일부터는 14회에 걸쳐 당시의 비행 상황을 기록한 ‘삼남 재지(災地) 조사 비행기’를 연재했다. 1936년 중반 그가 조선일보를 떠난 후 조선일보는 후임 조종사를 구하지 못해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전용기를 하늘로 날리지 못했다.

신용욱은 1936년 9월 조선항공공업사를 설립함으로써 비행사에서 비행 사업가로 변신하고 1936년 10월 13일 서울~이리 간 정기항로를 개척했다. 신용욱에 앞서 국내 첫 정기항공 노선을 개척한 것은 일본항공주식회사였다. 1929년 4월부터 도쿄~중국 대련 간 정기 항로를 개설하면서 후쿠오카~대구~서울~평양~신의주를 중간 기착지로 삼은 것이 정기항로의 시작이었다.

 

시련 겪기도 했지만 항공 사업에 대한 집념 좀처럼 꺾이지 않아

신용욱이 개척한 서울~이리 노선에는 ‘조선동포호’로 명명된 4인승 쌍엽기가 주 1회 운항되었다. 전북 이리를 첫 목표지로 삼은 것은 이미 조선의 주요 도시에 항로를 개설해온 일본항공이 아직 호남 지방에만은 정기항로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이리 간 정기항로는 한국인에 의한 첫 민간 항로 개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신용욱은 ‘에어 택시’ 사업도 함께 시작했는데 울산, 대구, 평양, 신의주, 청진 등 비행장이 있는 곳에서 신청이 오면 언제든 비행기를 몰고 가 승객을 싣고 왔다. 신용욱은 노선을 확대할 때 비행기가 부족하면 일본군으로부터 불하받았다. 1940년까지 신용욱이 불하받은 군용기는 10기나 되었다. 1939년에는 당시 최고 여객기로 인정받고 있는 ‘DC-3’기를 미국에서 도입했다.

신용욱은 DC-3기를 중국 해남도에 부정기적으로 취항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여서 중국 남방으로 가는 군인과 상인이 많았기 때문에 수입은 좋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일본군 수송을 맡아 일본군의 침략 전쟁을 도왔다. 신용욱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 준 것은 항공수송 사업 말고 또 있었다. 우리나라 처음으로 시작한 글라이더 제작․판매 사업이었다. 일본에서 초급기 글라이더 1대를 들여와 규격을 동일하게 제작․판매했는데 이게 빅 히트를 쳤다.

해방 후인 1948년 신용욱은 민간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하고 1948년 10월 30일 대한민국 최초의 정기항로인 서울~부산 노선에 민간 여객기를 취항했다. 첫 취항기는 2차대전 때 미군이 정찰․관측용으로 쓰던 경비행기 ‘스틴슨’이었는데 이 비행기를 5인승으로 개조해 하늘로 띄운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항공의 날’은 이 10월 30일을 기념하고 있다.

신용욱은 그러나 일제하에서의 친일 행위가 문제가 되어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체포되었다. 1개월 뒤 불기소처분을 받긴 했으나 친일 행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후 신용욱은 1950년 2대, 1954년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부정축재자로 투옥되었다가 한강에 투신자살

1950년 6․25 때 보유한 비행기를 모두 징발당해 빈털터리가 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항공 사업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 중인데도 1950년 12월 더글러스 항공사의 ‘DC-3’기 2대를 임차해, 부산에서 광주, 군산, 후쿠오카 등지로 취항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10월에는 72인승 ‘DC-4’기를 도입, 서울~부산 간을 정기 운항한 것은 물론 서울~홍콩 간도 임시 취항했다. 1954년 8월 29일에는 이 ‘DC-4’기로 우리나라 항공사상 최초로 서울~타이베이~홍콩을 연결하는 주 1회 국제항로를 열었다.

신용욱은 당시 유력 정치인들의 아호를 따 비행기에 이름을 붙이는 등 정치색 짙은 수완에도 능했다. 우남호(이승만), 창랑호(장택상), 만송호(이기붕) 등이 바로 그것인데 이 중 ‘우남호’는 영광을 누린 반면 ‘창랑호’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1955년 10월 평화신문사에서 하와이 동포 1세들을 모국에 초청하는 행사를 할 때 신용욱은 그 수송을 맡아 ‘우남호’를 취항시켰다. ‘우남호’는 도쿄를 거쳐 호놀룰루로 날아가 46명의 동포를 태우고 여의도 비행장에 무사히 도착, 우리나라 민간항공 사상 최초로 태평양 횡단비행 기록을 세웠다.

‘창랑호’는 1958년 2월 16일 국내 승객 28명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경기도 평택 상공에서 북으로 피랍되는 바람에 민간항공 사상 첫 피랍 여행기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승객 대부분은 한 달 후 돌아왔으나 기체는 북에 압류되어 신용욱에게 재산상 큰 손해를 안겨주었다. 이런 악재 속에서도 신용욱은 1959년 7월 서울~미국 시애틀 간 부정기 운항을 개시하는 등 항공 사업을 확대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회사의 적자는 쌓여가고 운명의 여신은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 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8월 25일 한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사실상 파산 지경에 이른 회사는 1962년 11월 공식적으로 날개를 접고 5․16 군사정부가 새로 설립한 ‘대한항공공사’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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