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로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 수상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자 식민지 화단의 별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에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거머쥠으로써 단박에 조선 화단의 대표 주자로 부상했다. 이런 그에게 “선전 최대의 감격”,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16살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난한 집안 탓에 중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디자인 인쇄를 다루는 대구미술사에서 생계를 꾸리며 그림을 배웠다. 대구미술사는 도쿄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대구에서 수채화가로 활동하던 서동진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인성은 16살이던 1928년 10월 개벽사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출품한 수채화 ‘촌락의 풍경’이 특선을 차지해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1929년 8월에는 선전에 수채화 ‘그늘’을 출품해 스승 서동진과 나란히 입선하는 것으로 등단했다. 1930년 5월 ‘겨울 어느 날’로 선전에서 또다시 입선하고 1931년 5월 ‘세모가경’이 처음 특선에 뽑혀 이인성은 서서히 대구 화단의 자부심으로 떠올랐다.

이인성은 대구여고보 교장이자 고미술 수집가이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낮에는 크레용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인성은 일본에서 서구 미술의 후기인상주의 기법을 익혀 조선의 향토적 서정주의로 승화․토착화시키며 나름의 주체적 화풍으로 소화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빠짐없이 각종 전람회에 출품해 그때마다 특선이나 입선을 차지했다.

1932년 선전에서는 ‘카이유’가 특선을 하고 일본의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는 ‘여름 어느 날’이 입선을 했다. 1933년에도 선전에서 특선을 하고 일본의 제전에서는 입선했다. 1934년 5월의 선전에서는 ‘가을 어느 날’이 특선하고 1935년 전일본수채화회전에서는 ‘아리랑 고개’가 최고상을 차지했다. 이렇듯 이인성은 일본에서도 “조선의 천재 소년”으로 불리며 각종 상을 휩쓸고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이 그의 근황을 전할 정도로 관심과 주목을 끌었다.

이 가운데 1934년의 선전 특선작인 ‘가을 어느 날’은 훗날 ‘향토색 미술’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이인성은 “조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붉은 대지 위에 핀 시든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햇볕에 그을린 상반신을 드러낸 여인과 소녀를 그렸다.

강렬한 색채로 조선의 풍광과 조선 사람의 생활상을 그린 ‘가을 어느 날’에 대한 미술계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전통 회화의 연면한 흐름을 부정한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향토색 시도를 조선 회화의 전통과 연결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화가의 향토색이 순수한 민족주의의 발로인지 아니면 식민지 조선을 반라의 여성으로 표상되는 미개한 땅으로 규정하려 한 총독부의 입맛에 맞춘 건지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선전 최고상 수상 후 촉망받는 신예에서 우리 화단의 정점으로 급부상

1935년 귀국한 이인성은 그해 5월의 선전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아 촉망받는 신예에서 우리 화단의 정점으로 급부상했다. ‘경주의 산곡에서’는 1998년 2월 ‘월간미술’지가 미술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 유화 베스트 10’에 김관호의 ‘해질 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될 만큼 우리 미술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인성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대구 남산병원 원장의 딸과 1935년 6월 결혼했다. 결혼 덕에 넓은 아틀리에를 병원 3층에 마련하고 11월 1일 이비시야 백화점 2층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1936년에는 대구 최초로 양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제15회 선전에서 총독부상을 차지했다. 이렇게 선전 제10회(1931)부터 15회(1936)까지 6회 연속 특선의 실력을 인정받자 1937년 제16회 선전 때는 새로 신설된 추천작가 제도에 의해 동양화가 김은호와 함께 25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 무렵 이인성은 손기정, 최승희와 더불어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었고 식민지 화단의 별이자 아이콘이었다. 신문들은 ‘조선의 보물’이니 ‘화단의 중진’이니 하면서 이인성을 부추기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이인성은 1937년 순수 예술다방을 표방한 ‘아르스’를 대구에 열었다. 예술인들이 차를 마시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살롱 같은 곳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100호짜리 2폭으로 된 대작 ‘한정’을 걸어놓았다. 그런데 1937년 10월 28일 김부돌이라는 사람이 그림을 칼로 찢고 이인성이 그 칼을 빼앗아 김부돌의 얼굴을 찌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인성이 이미 추천작가가 되어 선전에서 수상할 자격이 없는데도 김부돌은 이인성이 선전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주지 않자 화업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림에 더욱 정진하라는 뜻에서 일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사건은 김부돌의 진심을 알게 된 이인성이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가을 어느 날’, 향토색 미술 논쟁 불러 일으켜

이인성은 이처럼 화가로서는 절정기를 보냈지만 개인사에는 불행이 겹쳤다. 1939년부터 1940년 어린 아들과 딸이 죽더니 1942년에는 부인까지 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충격에 빠진 이인성은 술로 시름을 달랬고 이로 인해 주벽이 점점 심해졌다. 1944년 재혼했으나 이번에는 부인이 이듬해 딸을 낳은 뒤 가출, 또다시 파경을 맞았다.

1945년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하고 1947년 6월 세 번째 결혼을 한 뒤에는 안정을 찾았다. 1948년 6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의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문제는 술이었다. 1950년 11월 3일 밤, 서울 굴레방다리 근처의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북아현동 집으로 가던 길에 경찰과 시비를 벌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가 집까지 찾아온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쓰러져 이튿날 아침 38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인성의 이름은 이후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이인성이 추구한 ‘조선 향토색’이 일제가 조장한 지방색의 일환이고, 일제시대 조선 화가들이 만든 서화협회전(협전) 등에는 작품을 내지 않은 채 관전인 조선미전에만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게 첫째 이유다. 이인성의 까다로운 성격에다가 가정사로 인한 주벽과 주사로 인해 주위에 적이 많았다는 것도 주요 이유였다. 겨우 38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작품이 소장가들의 품속에서 나올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런 지적들이 편견이든 사실이든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불식할 시간적 여유 없이 또 이인성을 변호해 줄 후배나 제자를 만들지 않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성은 “한국적 이상주의를 토착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화풍은 ‘이인성류’로 발전해 근현대 한국 미술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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