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있을 수 없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나치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와 에른스트 룀(1887~1934)은 초기 나치당의 두 주역이었다. 두 사람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 비슷한 점도 많았지만 출신 등에서는 달랐다. 히틀러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들게 성장한 반면 룀은 뮌헨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성장했다.
룀은 1906년 19살의 나이로 독일군에 입대하고 1차대전 때는 장교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 포탄 파편을 맞아 얼굴이 동물 코 모양의 끔찍한 모습으로 바뀌고 이후에도 두 번 더 부상을 겪었는데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을 떠나지 않았다. 1918년 11월 1차대전 후 왕조가 붕괴되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귀족 가문 출신의 룀은 충격을 받았다. 룀은 군복을 벗고 제대 군인과 우익 장교들이 조직한 의용병 단체 ‘자유군단’에 가입했다.
룀이 상등병 출신의 히틀러를 처음 만난 것은 1919년 가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다. 둘 다 서로의 전쟁 상처를 이해했고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베르사유 조약으로 세워진 공화국을 증오했다. 룀은 히틀러와 함께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했다. 독일노동자당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으로 바뀔 때도 당에 남았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정치기구를 맡고 룀은 군사 부문을 맡았다.
1921년 룀은 자유군단 대원을 기반으로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를 조직했다. 룀은 1923년 11월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 때 돌격대를 동원했다가 히틀러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더욱 친밀해진 두 사람은 1924년 12월 함께 석방되었다.
나치당과 돌격대 모두 공식적으로 활동이 금지되자 히틀러는 선거를 통한 권력 장악으로 방침을 바꿨다. 히틀러는 1920년대 말까지 나치당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했다. 그 사이 히틀러의 열정적인 지지자 괴벨스는 준군사조직인 돌격대를 순수한 젊은이들의 모임으로 바꿨다. 룀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돌격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사라지고 나치당이 국가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룀은 모든 직위를 포기하고 남미의 볼리비아군 고문이 되어 독일을 떠났다.
히틀러와 룀은 초기 나치당의 두 주역
룀이 남미에서 지낸 5년 동안 나치당은 독일제국회의에서 의석을 얻고 1930년 9월 총선에서 18.3%의 득표로 107석을 얻어 일약 제2당으로 부상했다. 이런 과정에서 히틀러를 보좌하고 지원한 것은 ‘돌격대(SA)’가 아니라 하인리히 힘러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친위대(SS)’였다. 룀이 독일에 없는 동안 돌격대는 통제가 안 되었다. 1930년 8월 히틀러는 룀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로 돌아와 돌격대를 다시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룀은 1931년 1월 돌아와 돌격대를 재조직했다. 이후 돌격대는 1년 만에 8만 명에서 22만 명으로 확대되고 불순한 대원들은 제거되었다. 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돌격대는 정당의 특정 분파에 의해 통솔되지 않는 독립된 조직이어야 한다”며 돌격대를 독일 제3제국의 정규군으로 만들려고 했다. 히틀러가 허용하지 않자 결국 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히틀러는 돌격대가 절대 충성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룀과 힘러의 대립이었다. 룀에게는 돌격대가 있었고 힘러에게는 친위대가 있었다. 돌격대원들은 노동자 계층들로 구성된 반면 친위대 대원 대부분은 자칭 엘리트임을 자부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에도 돌격대 조직은 계속 커져 1934년 초쯤에는 약 300만 명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는데도 룀이 히틀러에게 복종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을 통솔하던 프로이센 군사 엘리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룀은 히틀러가 혁명 원칙을 배신하고 진정한 군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패거리에 가담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나를 밟을 수 없다. 모든 주요 직위는 내 측근들 손안에 있다. 히틀러는 나에게 300만 명의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동료에게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룀은 원하기만 하면 독일군과 친위대 모두를 격퇴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독일 노래 가사 중 한 소절인 ‘긴 칼의 밤’의 시작
권력을 강화하려는 히틀러에게 룀과 돌격대는 방해물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룀이 절친한 동지라는 사실을 의식해 룀을 제거하는 데 주저했다. 그러자 히틀러의 두 충복 힘러와 괴링이 룀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몄다. 힘러가 보기에 돌격대의 기를 꺾지 못한다면 자신이 조직한 친위대의 미래도 불안했다. 당시 룀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생활에 빠져 있었다. 사생활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동성애 성향을 범죄시하던 시절에 젊은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도 숨기지 않았다.
힘러와 괴링은 룀이 돌격대를 게이 사교 클럽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히틀러에게 보고했으나 히틀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힘러와 괴링이 “프랑스가 히틀러 정부 전복 대가로 룀에게 1,200만 프랑을 주기로 했다”, “룀과 돌격대가 독일 장악을 위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등 날조된 이야기를 계속 보고하자 히틀러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히틀러는 룀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히틀러가 무장 친위대를 이끌고 룀과 그의 부관, 다른 돌격대 지도자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쳐들어가 룀을 반역자로 체포한 것은 1934년 6월 30일 아침이었다. 이날 밤부터 룀과 돌격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당시 인기 있는 독일 노래 가사 중 한 소절인 ‘긴 칼의 밤’이 시작된 것이다.
히틀러는 처음엔 오랜 전우인 룀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나 룀을 죽여야 한다는 힘러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7월 1일 친위대가 룀에게 권총을 주며 자살하도록 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자살하지 않자 친위대가 직접 방아쇠를 당겼다. 한때는 나치당의 2인자이던 그레고어 슈트라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총리이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과거 뮌헨 맥주홀 폭동을 진압했던 바이에른주 총독 등도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긴 칼의 밤’으로 90~200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