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애리수 ‘황성의 적’ 음반 발매

‘황성 옛터’ 한 곡으로 일약 스타 가수 돼

1927년 여름, 작곡가 전수린이 경기도 개성으로 떠나는 순회공연단을 따라나섰다. 전수린은 훗날 ‘알뜰한 당신’,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등의 히트곡을 비롯한 1,000여 곡을 작곡해 인기 작곡가로 부상하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20살에 불과한 미완의 작곡가였다. 전수린이 고려의 옛 도읍지인 송도의 만월대를 둘러보는데 잡초가 무성하고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이 교차했다.

그 후 전수린은 그때 느꼈던 허무한 감정을 떠올리며 멜로디를 오선지에 그려 넣었다. 그러자 전수린과 함께 만월대를 둘러본 왕평이 그 곡에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로 시작하는 가사를 붙여 ‘황성의 적(跡)’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렇게 완성된 노래는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은 동방예술단 소속의 여배우 신일선에게 주어졌다. 신일선은 연극 막간 무대에 나가 ‘황성의 적’을 불렀다. 하지만 노래 임자는 따로 있었다. ‘황성의 적’으로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끌어낸 이애리수(1910~2009)였다.

그녀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9살 때 극단 신극좌에서 무대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민중극단과 취성좌 등에서 활동하며 본명 대신 ‘앨리스’에서 따온 이애리수를 예명으로 사용했다. 이애리수가 극단 취성좌의 공연이 있던 서울 단성사 극장의 막간 무대에서 ‘황성의 적’을 부른 것은 1928년 가을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담아 구슬프게 부르는 이애리수의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지자 극장 안은 금세 숙연해졌고 관객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로 배우로 활동하던 이애리수는 이 노래 한 곡으로 일약 스타 가수가 되었다. 막간에서 ‘황성의 적’을 부를 때면 공연장인 단성사는 연일 만원 사례 속에 함성과 박수로 들끓었다. 이애리수는 이후에도 취성좌의 각종 공연에 출연하는 한편 1930년 3월 기록상 공식 데뷔곡인 ‘정숙이와 월성이’, ‘군밤타령’ 등을 빅터레코드에서 취입했다. 1930년 12월에도 번안곡 ‘메리의 노래’, 유행가 ‘부활’ 등을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해 명성을 이어갔다. ‘황성의 적’은 1932년 3월 빅터레코드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어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5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대 최고 인기 구가했으나 돌연 연예계를 떠나 팬들 안타깝게 해

언제부턴가 ‘황성 옛터’로 제목이 바뀐 ‘황성의 적’을 두고 일부 언론이 한국인 최초의 창작 가요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인 최초의 창작 가요는 ‘황성 옛터’ 음반보다 3년 앞선 1929년 콜롬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김서정 작사․작곡의 ‘낙화유수’(일명 강남 달)이기 때문이다. 이정숙이 취입한 ‘낙화유수’는 1927년 제작된 동명의 무성영화 주제가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따라서 ‘황성 옛터’는 국내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라기보다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만개시킨 최초의 히트곡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귀에 익숙한 ‘희망가’나 ‘사의 찬미’ 같은 노래들은 순수 창작 가요가 아니라 외국 번안곡이다.

‘황성의 적’이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는 일부 언론 보도 역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즉 1935년 말까지 금지 처분을 받은 음반 목록에서 ‘황성의 적’을 찾아볼 수 없고 1938년에 ‘황성의 적’ 음반이 재발매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황성 옛터’는 이후에도 수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남인수, 신카나리아, 김정구, 이미자, 조용필, 배호, 나훈아, 은방울자매, 윤복희, 박일남, 이은하, 한영애 등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수들이 총망라되어 노래에 불멸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애리수는 이렇게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나 결혼 후 돌연 연예계를 떠나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애리수는 22세 때인 1932년 9월 연희전문생 배동필을 만나 서로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이 이미 결혼한 유부남인 데다 배동필 부친의 반대에 부닥쳐 결혼이 어렵게 되자 1933년 1월 9일 배동필과 함께 약을 먹고 동맥을 끊어 동반 자살을 기도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결국 배동필의 부친은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식은 하지 말고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주변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조건을 내세워 결혼을 허락했다.

이렇게 살림을 시작한 이애리수는 1933년 초 발매된 ‘꽃각시 설움’을 마지막으로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었다. 그런데 2년쯤 뒤인 1935년 5월 19일 또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또 한 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수년 전 헤어진 배동필의 본처가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 “죽어도 배씨 집안의 귀신이 되겠다”며 생떼를 쓰는 바람에 이미 2명의 딸까지 낳고도 또다시 약을 먹은 것이다.

이 보도 후 이애리수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배동필의 부인 겸 2남 7녀의 어머니로 살던 그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70년도 더 지난 2008년 10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2009년 3월 99세로 눈을 감아 그동안의 행적도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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