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교신 ‘성서조선’ 창간

무교회주의를 이 땅에 착근시키는 데 일생 바쳐

김교신(1901~1945)은 44년의 삶을 신앙인과 교육자로 치열하게 살았다. 특히 무교회주의를 표방한 월간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고 무교회주의를 이 땅에 착근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김교신은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4월 도쿄에서 접한 한 노방전도자의 설교를 계기로 기독교에 입교하고 그해 6월 27일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해 11월 교회 목회자가 반대파의 음모와 술책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21년 일본 ‘무교회 신앙운동’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 무교회주의자로 변신했다. 당시 우치무라에게 무교회 신앙의 가르침을 받은 한국인은 함석헌, 송두용, 류석동 등도 있었다. 우치무라는 천황의 ‘교육칙어’와 러일전쟁을 반대하고 일본 사회의 부패상을 정면에서 비판한 기독교 사상가였다. 무교회주의는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만인 사제론’과 ‘성서 지상주의’의 종교개혁 정신에 입각해 인간이 만든 조직과 제도를 부정하고 오직 예수와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역시 제도적 교회나 교단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김교신이 “우리 예배당의 벽은 북한산성이요, 천정은 화성과 목성이 달린 청공(靑空)이요, 좌석은 숲 속의 반석이요…”라고 말한 것은 신앙인이라면 삶의 자리가 바로 예배당이란 뜻이었다. 김교신은 1922년 4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전과해 1927년 3월 졸업했다.

그해 4월 귀국 후에는 함흥의 영생여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함석헌·송두용·류석동·양인성·정상훈과 함께 1927년 7월 ‘성서조선’을 창간하고 매주 일요일 성서 연구 모임을 열었다. 성서조선은 창간사에서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국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라고 밝힘으로써 ‘무교회주의’를 표방했다. 이후 성서조선은 무교회 신앙을 한국에 소개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성서조선은 1930년 5월호부터 동인지 형식에서 벗어나 김교신 혼자 기사 작성은 물론 편집·교정·발송·경리까지 도맡아 하는 개인 잡지가 되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바친 열정은 대단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지친 몸으로 성서를 연구해 매월 빠짐없이 성서조선을 발간했다. 훗날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도 성서조선 1934년 2월호부터 1935년 12월호까지 22회에 걸쳐 연재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통해 특정 공간이 아닌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교회이며, 성서는 성직자나 교회가 아닌 신자 각자가 하나님에게 받는 믿음과 은총의 분수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목사나 장로 같은 교회 안의 직책은 무의미한 것이고 서양 기독교의 형식과 제도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 김치 냄새가 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러자 기존 기독교 교단이 김교신의 태도를 교회의 안정된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김교신의 활동에 훼방을 놓았다. 김교신이 해방 후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이렇듯 정통 기독교로부터 이단자로 몰린 것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 김치 냄새가 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김교신은 1928년 3월 서울 양정고보로 전근해 이후 12년 동안 인재들을 길러냈다. 농촌운동가 유달영,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훗날 조계종 종정이 될 서옹 스님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손기정이 1935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최종예선에 출전할 때는 마라톤 코치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손기정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데 힘을 보탰다.

일본어로만 수업을 해야 했던 그 시절, 김교신은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한국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좌절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헤어스타일에 멋을 부리는 학생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스스로 머리카락을 박박 밀어버려 학생들은 그를 ‘양(洋)칼 선생’으로 불렀다. 이후 경기고보와 개성의 송도고보로 전근해서도 지리학과 박물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기를 심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제가 성서조선에 실린 권두언을 트집 잡은 이른바 ‘성서조선 필화 사건’이 일어났다. 개구리의 죽음을 추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란 제목의 권두언이 성서조선에 실린 것은 1942년 3월호였다. ‘조와’는 김교신이 개성 송악산의 기도터 연못가에서 극심한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을 묻어주며 그 추위에서도 살아남은 개구리들에 대한 감회를 토로한 글이다.

일제가 문제 삼은 부분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凍死)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해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였다. 물론 이 표현은 역사의 암흑기에서 민족 해방의 꿈을 노래한 김교신의 예언이었다.

김교신은 1942년 3월 30일 출근길에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함석헌, 송두용, 유달영 등도 검거되었다.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전국의 독자 300여 명이 소장하고 있는 성서조선은 모두 불태워졌다. 결국 김교신과 함석헌, 송두용, 유달영 등 13명은 옥고를 치렀다.

김교신은 1년 만인 1943년 3월 29일 풀려난 후 그해 7월 조선인 노무자 5,000여 명이 징용으로 끌려가 있는 흥남 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가 하수도 수리, 변소 청소 등 궂은 일을 하며 위생 계몽에 앞장섰다. 밤에는 야학을 열고 한글을 가르쳤다. 그러다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둔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에 걸려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송두용은 해방 후 ‘성서신애’ 잡지를 발간하며 활동을 계속했다. 함석헌은 1930년대 중반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종교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고 불경과 노자․장자 등에 탐닉하다 마지막에는 퀘이커교에 기울어 무교회주의와 결별했다. 김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노평구는 해방 후인 1946년 11월 스승의 뒤를 이어 무교회주의 월간지인 ‘성서연구’를 창간했다. 성서연구는 1999년 12월 500호로 종간될 때까지 한국에서 무교회주의 신앙의 보루 역할을 했다.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1861~1930)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다. 그는 제도 교회의 독선을 경계하는 ‘무교회 신앙’을 열었고 전쟁을 일으킨 그의 조국 일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불벼락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해 ‘국적(國賊)’으로 낙인찍혔다. 도쿄의 사무라이 가정에서 태어난 우치무라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삿포로 농업학교에 재학 중일 때였다. 당시 삿포로 농업학교 학생들을 기독교 세계로 이끈 인물은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교수로,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농업대학 학장으로 있다가 삿포로 농업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클라크가 귀국할 때 작별 인사로 한 말이 그 유명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다.

우치무라는 1878년 삿포로 농업학교의 성서 집회에 참석하면서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졸업식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평생을 두 ‘J’에게 바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을 치렀다. 두 ‘J’는 ‘예수(Jesus)’와 ‘일본(Japan)’이었다. 우치무라는 1884년 기독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애머스트대와 하트퍼드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8년 귀국,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우치무라가 일본 열도를 흔들어놓은 것은 1891년 1월 9일이었다. 그날 제일고등중학교 강당에는 교사 60명과 학생 1,000여 명이 모여 있었고, 단상에는 일본인의 신이던 메이지 천황의 초상과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가 놓여 있었다. 칙어 낭독이 있은 후 한 사람씩 단상에 올라가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행사 때 우치무라는 홀로 절을 하지 않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절을 하지 않은 것은 일본 제국 헌법이 ‘신성불가침’이라고 규정한 천황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었다. 언론은 그의 행동을 “비국민의 행각”이라고 침소봉대하면서 ‘불경 사건’으로 몰아갔다. 우치무라는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고 ‘국적’으로 낙인찍혔다. 이후 오사카, 구마모토, 나고야 등 지방에서 기독교 학교 등을 전전하다가 그만두고 ‘만조보’의 영문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

 “전쟁 일으키면 하나님이 일본에 불벼락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

우치무라는 그 무렵 일어난 청일전쟁(1894~1895년)에 대해서는 일본의 파병을 찬성하는 ‘의전론(義戰論)’을 폈다. 즉 청일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세계 역사의 진보를 위해 일본이 공헌하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조는 은둔 국가인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진보 국가인 일본이 퇴보 국가인 중국을 일깨우기 위한 전쟁이라고 해석한 당시의 일반 저널리즘의 전쟁론과 별 차이가 없었다. 1898년 미국이 쿠바에서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같은 해 필리핀을 점령한 것에 대해서는 ‘문명과 정의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당시의 국민주의와 문명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이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 그 후의 한국의 상황과 역사적 추이를 이해하고부터는 ‘비전론’이나 ‘반전론’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러일전쟁(1904~1905년) 때는 비전론을 펼쳤으며 러일전쟁이 끝나 일본 전역이 승전 분위기에 도취해 있을 때는 “앞으로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한다면서 더 큰 전쟁을 할 것”이라며 “그러면 하나님이 일본에 불벼락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치무라는 1900년 성서연구회를 만들고 ‘성서연구’지를 창간해 본격적으로 무교회주의를 표방했다. 교회나 세례의 유무는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성서에 의지하는 무교회주의가 진정한 기독교라고 설파했다. 또한 “서양의 역사 속에서 왜곡·굴절된 기독교 교파는 일본의 토양에 적합하지 못하다”며 “일본 기독교는 일본인 특유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독교의 진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치무라가 조선 백성에 대한 동정과 신앙으로 가득 찬 격려를 하고 다소 친한(親韓)적인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병합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선 병합 후 식민 지배의 현실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 의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진정한 합동 융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과제로 삼았다. 즉 천황의 신격화나 조선에서의 폭력적인 식민화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긴 했으나 서구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과 아시아에서 ‘개화의 영도자’가 된 일본의 특별한 역할, 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같은 근대주의적 편견은 끝내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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