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윤극영, 동요 ‘반달’ 작곡… 한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동요

↑ 왼쪽부터 젊은 시절 윤극영 모습, 동요 ‘반달’이 수록된 우리나라 최초 동요곡집 ‘반달’, 동요 ‘반달’ 악보

 

한국에서 태어난 40대 이상 치고 윤극영의 동요 모르는 사람 없어

우리나라 동요 90년사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오직 한 명의 동요 작곡가를 꼽으라면 단연 윤극영(1903-1988)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40대 이상 치고 윤극영의 동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40대 이상 대부분도 자신이 알고 있는 동요가 윤극영의 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따라 부른다. 윤극영이 작곡한 대표 동요는 ‘반달’이다. ‘고드름’, ‘설날’ ‘기찻길옆’ ‘따오기’ ‘꼬부랑 할머니’ ‘나란히 나란히’ 등도 윤극영이 작곡했다.

윤극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고보에 입학했다.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 일본 천황을 폭살하려다 실패한 박열 열사가 경성고보 동기다. 윤극영은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친척이자 구한말 사상가인 윤치호가 윤극영의 부모를 설득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었다.

윤극영은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음악학교와 도요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러던 1923년 3월 어느 날 윤극영의 하숙집에 초면인 방정환이 찾아왔다. 4살이 많은 방정환은 윤극영에게 “나는 창작 동화에 힘쓸 테니 윤 형은 이 땅의 어린이를 위해 동요 작곡에 힘써 달라”며 “함께 어린이 문화사업을 하자”고 권했다. 윤극영이 훗날 “그날 밤 내 운명이 바뀌었다”고 술회했듯 그 순간은 윤극영의 인생 행로에 분기점이 되었다. 윤극영은 1923년 5월 1일 조재호, 진장섭, 손진태, 정순철, 고한승 등과 함께 방정환이 우리나라 최초로 구상한 어린이 문화단체 ‘색동회’를 도쿄에서 발족시켰다.

윤극영은 1923년 9월 도쿄대지진의 난리를 겪고 귀국한 뒤, 부친이 뒤뜰에 마련해준 ‘일성당’이라는 별채를 자신의 음악 산실로 삼았다. 그곳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소년소녀합창단 ‘다알리아회’라는 노래 모임을 만들어 동요 보급 운동을 펼쳤다. 동요 작곡에도 힘을 쏟아 1926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반달’ ‘설날’ ‘따오기’ ‘고드름’ 등 주옥같은 동요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가운데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시작하는 ‘반달’은 한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동요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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