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백정 신분 철폐 위한 ‘조선 형평사’ 창립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 후 백정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자식들의 교육

예로부터 도살과 육류 판매 등에 종사해온 백정은 기녀나 머슴들로부터도 천대와 멸시를 받을 정도로 천민층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일반인과 혼인하거나 같은 마을에 살지 못했다. 기와집에 살아서도 비단옷을 입어서도 안 되었으며 갓을 쓰거나 도포를 입는 것도 금지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에 따라 법적으로 해방되긴 했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차별 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신분제 철폐 후 백정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식들의 교육이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만은 차별 없는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가 되어도 백정의 호적부에 표시된, 도살업자를 의미하는 ‘도한’이나 붉은 점이 사라지지 않아 백정의 자식들은 여전히 교육에 접근하지 못했다.

1920년대 경남 진주의 백정 이학찬도 그랬다. 자산가였던 그는 현금 100원을 기부하고 아들을 진주의 제3야학교에 입학시켰으나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진주에 일신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될 때도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70여 명의 다른 백정과 함께 학교 공사를 도왔으나 입학을 거부당했다.

분개한 이학찬은 당시 조선일보의 진주지국장으로 있는 신현수,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강상호 등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신현수와 강상호 등은 백정이 아닌데도 이학찬과 함께 백정 신분 철폐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동참자 중에는 경남 의령 출신의 장지필도 있었다. 그는 백정 출신이었으나 메이지대 법대에서 3년간 수학한 엘리트였다. 장지필은 귀국 후 총독부에 취직하려고 서류를 작성하던 중 자신의 호적등본에 ‘도한’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취직을 포기했다. 당시 진주에는 350여 명의 백정이 특수부락을 형성해 살고 있었다.

백정들의 신분 철폐운동을 주도할 ‘조선 형평사’가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남 진주 청년회관에서 창립된 것은 1923년 4월 25일이었다. ‘형평(衡平)’에서 ‘형’은 백정들이 고기를 달아서 팔 때 사용하는 저울대를 뜻하고 ‘평’은 사회 신분을 평등케 한다는 뜻이다. 총회 결과 강상호가 형평사 사장으로, 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이학찬 등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형평사는 창립 취지문에서 전국의 백정 수가 40만 명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는 백정의 수가 3만 3,7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과장된 숫자로 보인다.

 

진보적인 사회단체의 후원 받아 무섭게 확산돼

문제는 백정들의 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었다. 구습을 타파하려는 형평사 운동에 지역 농민들이 반발한 게 1차 걸림돌이었다. 형평사가 창립되고 1개월 만인 1923년 5월 24일, 2,000여 명의 농민이 군중대회를 열어 조직적으로 반대에 나섰다. 그들은 우육불매운동을 벌이고 형평사를 돕는 사회단체원들은 ‘신백정’이라고 낙인찍었다. 형평사 창립 장소인 청년회관은 도살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형평사 사장 강상호도 구타했다. 1923년 8월 1일 경남 김해에 형평사 지사가 설립되었을 때도 1만여 명의 농민이 나타나 3일 동안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 등의 건물을 파괴하고 난동을 부렸다.

이처럼 각종 멸시와 냉대 속에서도 형평사의 세는 진보적인 사회단체의 후원을 받아 무섭게 확산되었다. 1년 만에 전국적으로 12개 지사와 67개 분사를 가진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굳게 단결해온 운동은 1924년 2월 10일 300여 명이 참석한 부산의 임시총회를 계기로 노선 차이와 분열을 드러냈다. 강상호․신현수 등의 보수파와 장지필 등의 혁신파로 나뉜 것이다. 보수파는 형평운동의 노선을 인권 옹호에 무게를 두고 형평사 본부를 부산(후에 진주)에 둘 것을 주장한 반면 혁신파는 운동 노선을 신분해방에 두고 서울 본부를 중심으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연계해 더욱 혁신적인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혁신파는 1924년 4월 25일 서울에서 형평운동 1주년 기념 ‘형평사 전조선대회’를 열어 형평사혁신동맹 총본부를 발족시키고 ‘형평사’지 발간, 피혁공장 설립 등을 결정했다. 보수파 역시 4월 24일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 1주년 기념 ‘형평사 전조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양파는 결별의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양파는 1924년 8월 15일 전국 31개 형평사 대표 51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에서 ‘형평사 통일대회’를 열어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를 출범시키고 총본부를 서울에 두기로 합의함으로써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

1925년 4월의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형평청년회, 형평학우운동, 형평여자동맹 등을 조직해 세력을 확대했으나 형평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1924년 7월 충남 천안군 입장면에서 반형평운동이 일어나고 1925년 8월 경북 예천에서 형평사와 지방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는 등 반형평운동이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럼에도 형평운동의 결속력은 더욱 강해지고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문제는 여전한 조선형평사 총본부의 분열이었다. 1929년 4월 제7회 정기총회 때 급진파가 총본부 간부들을 개량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더욱 혁명적 투쟁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대립이 더욱 격화했다. 1931년 4월 제9회 정기총회에서는 비록 부결되었으나 급진파가 조선형평사 총본부 해소(해산) 건의안을 제출하는 등 양측의 대립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던 중 일제가 1933년 1월 갑자기 형평사 안에 비밀결사 형평청년전위동맹이 조직되었다면서 100여 명을 조사한 후 14명을 구속하고 51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총본부는 1933년 4월 정기총회에서 합법적 온건 노선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기세는 다시 살아나지 못해 점차 소멸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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