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출간

20세기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17세기 이래 서양철학을 지배하던 ‘의식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에 자리를 내준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의식의 철학’이 ‘언어의 철학’으로 전환한 것인데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그를 “20세기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현대철학의 특징인 언어 전환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생전에 100쪽이 안 되는 ‘논리철학논고’라는 단 1권의 저작만을 출간했다. 오랜 사색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저작이 1권뿐인 것은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교정하다가 결말을 뒤로 미루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논리실증주의를 표방하는 ‘빈학파’ 철학자들과 20세기 영미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빈의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카네기”로 불렸던 오스트리아 철강 산업의 대부였다. 유대인이면서도 개신교를 믿었고 미술과 음악을 사랑했다. 아버지의 후원을 받은 클라라, 슈만, 말러, 브람스 등 유명 음악가들은 어린 비트겐슈타인에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집안의 예술적 분위기는 비트겐슈타인 형제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형제들 모두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비트겐슈타인도 클라리넷을 곧잘 연주하고 한동안은 지휘자가 될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4명의 형 가운데 3명이 자살해 집안 분위기는 어두웠다. 음악 신동으로 불리던 큰형은 사업가의 길을 강요하는 아버지와의 불화 끝에 1902년 미국에서 자살하고 둘째 형 역시 1904년 5월 독일 베를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셋째 형은 1918년 1차대전의 와중에 전선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직업 연주가로 활동했던 바로 위 형은 1차대전 중 오른팔을 잃었다.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이 넷째 형을 위해 지은 곡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비트겐슈타인도 훗날 자신의 젊은 시절이 극심한 고독과 자살의 충동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었다고 고백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기계에 관심과 재능이 많았다. 결국 재능을 살려 오스트리아 린츠의 기술고등학교와 독일 베를린의 기술전문대를 졸업하고 1908년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대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를 우연히 읽고 논리학, 수학, 철학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가을 맨체스터대를 떠나 러셀이 있는 케임브리지대로 옮겨 수학, 논리학, 철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훗날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정신적 체험 가운데 하나였다”며 “그는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극찬했다.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1월 부친이 사망한 뒤 노르웨이로 건너가 1년 동안 오두막에 칩거하며 논리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탈장 때문에 징집이 면제되었는데도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겠다며 오스트리아군에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사병으로 2년 뒤에는 장교로 복무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체험하면서도 참호 속에서 틈틈이 철학적 사색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물이 1918년 8월 완성된 ‘논리철학논고’ 원고다.

전쟁이 끝난 1918년 11월 이탈리아에서 전쟁 포로가 되어 9개월간 갇혀 있게 되자 원고를 가다듬어 러셀에게 보냈다. 러셀은 자신의 서문을 붙여 1921년 독일어로 된 ‘논리철학논고’를 출간했다. 러셀은 서문에서 “이 책이 궁극적인 진리를 주는 것으로 증명되든 증명되지 않든 그 폭과 범위와 심원성에서 철학계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서론에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는 철학사상 가장 오만한 선언을 했다.

1922년 11월 영문으로도 출간된 ‘논리철학논고’는 1.‘세계는 일어나는 일의 총체다’로 시작해 1.1, 1.11, 1.12…2, 2.01, 2.011 식으로 이어지다가 7.‘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끝을 맺는다. 내용이 난해하고 문체가 독특했는데도 발간 즉시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새로운 철학적 사조로 자리매김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상의 모든 오해와 혼란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말들도 무의미하며 사다리일 뿐이므로 사다리를 오른 사람은 이를 차버리라”고 권고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그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란 과학적 명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데, 윤리․종교․미학의 영역이 이에 속했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논제들은 애초부터 답을 낼 수 없는 잘못된 질문이므로 답이 없다고 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강력한 형이상학 파괴자로 인식되고 20세기 철학계에 불어닥친 탈형이상학 바람의 진원지 중 한 곳이 되었다.

 

그의 저술은 오늘날 영미 분석철학의 기념비적인 저작물

1919년 8월 포로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은 것은 아버지 사후 엄청나게 불어난 토지와 재산이었다. 그는 은행을 찾아가 자신이 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를 바란다며 돈을 즉각 처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희망에 따라 대부분의 재산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배분되었다. 자신은 저택을 떠나 하숙집을 전전하며 사범대 4학년으로 등록했다.

이후 1920년 9월 오스트리아의 외딴 산촌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6년 동안 교사로 일하며 구도자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그의 과도한 학생 체벌과 이를 악용한 일부 학생의 거짓 진술이 문제가 되어 가학적인 체벌 혐의로 1926년 고발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1926년 4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떠났다. 그 후 몇 달 동안 빈 근처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로 일하던 중 과거 자신의 결론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의혹에 부닥치자 자신의 ‘논고’를 자기비판하고 새로운 철학을 모색했다.

1929년 1월 케임브리지대로 돌아와 그해 6월 ‘논리철학논고’로 박사학위를 받고 1930년 12월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검소한 생활은 여전했다. 방에는 침대, 책상, 의자 등 기본적인 가구만 달랑 있었다. 1935년에는 소련 집단농장의 노동자가 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으나 스탈린 정권에 환멸을 느껴 다시 케임브리지대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분을 폐기하고 언어를 삶의 흐름 속에 놓인 도구로 이해하는 방식을 취했다. 언어관이 변화하니 철학관도 변모했다. 결국 윤리와 종교도 문법만 다를 뿐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생각은 그의 사후에 발간된 ‘철학적 탐구’(1953)에 반영되었다. ‘논리철학논고’가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면 ‘철학적 탐구’는 영어권 국가에서 약 25년간 번성한 분석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그의 논리적 언어 분석이 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세계를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들은 오늘날 영미 분석철학의 기념비적인 저작물로 평가받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1939년 케임브리지대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그해 2차대전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병원의 환자 수송 요원과 실험실 조수로 근무했다. 종전 후인 1944년 가을 다시 케임브리지대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할 생각으로 1947년 말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일랜드 해안가의 농장에 머물렀다. 1951년 4월 29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999년 ‘타임’지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할 때 철학자로는 유일하게 비트겐슈타인을 꼽아 생전에 그가 철학계에 남긴 공적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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