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우드로 윌슨 ‘14개조 평화 원칙’ 발표

1차대전 참전과 ‘14개조 평화 원칙’은 윌슨을 역사적 인물로 부각시킨 승부수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은 국내 문제엔 진보적이었고 외교 정책에선 이상주의자였다. 국내에서는 소득세 개정, 아동의 노동 금지, 독과점 행위 규제 등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고 외교에서는 이상주의자답게 도덕 정치를 역설했다. 1917년 1차대전 참전을 결정할 때도 자국의 이익보다는 세계 평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의 이상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18년 1월 발표한 ‘14개조 평화 원칙’이었다. 14개조에서 윌슨은 “세력이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모든 민족과 국가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으며, 더불어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천명해 “오직 힘이 말한다”는 기존 국제 질서의 상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문제는 현실 정치의 벽을 고려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으로 자신의 이상주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윌슨은 버지니아주 스탠턴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프린스턴대와 버지니아대 로스쿨을 거쳐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런저런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1902년 프린스턴대 총장으로 부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학내 세력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가 프린스턴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프린스턴대에서 학위를 딴 2명의 한국인 학생이 있었는데 김규식과 이승만이었다. 김규식은 1903년 석사학위를, 이승만은 191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윌슨은 자신의 이상을 책과 강의실이 아닌 현실에서 실현하기를 꿈꿨다. 그 결과 뉴저지 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1910년 10월 당선되었고 여세를 몰아 1913년 3월 백악관에까지 입성했다. 윌슨은 취임 후 ‘진보적 대통령’이라는 기대에 맞게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하고 어린이 노동 금지, 노동시간 단축 등 진보적 조치를 많이 취했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남부 출신의 백인 우월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취임 후 인종차별론자들을 요직에 앉히고 다수의 흑인 공무원을 해고했다. 남북전쟁 종전 때 철폐했던 인종 분리 사무실과 화장실 제도도 다시 도입했다. 이를 항의하는 흑인에게는 “흑백간의 인종 분리는 너희에게 치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혜택”이라며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윌슨은 백인 극우단체 KKK단을 찬양하기도 했다.

윌슨을 역사적 인물로 부각시킨 두 가지 승부수는 1차대전 참전 결정과 ‘14개조 평화 원칙’ 발표였다. 1차대전 참전의 경우,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본래 고립주의를 선호했던 자신의 대외 정책관도 이유였지만, 미국에 다수 존재하는 독일계와 영국·프랑스계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들기 곤란했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비무장 상선을 공격하는 등 적대 행위를 그치지 않고 독일의 치머만 전보 사건의 전모를 알고 나서는 참전을 결심했다.

 

14개조, “오직 힘이 말한다”는 기존 국제질서 상식 뒤집어

윌슨이 미국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8년 1월 8일이었다. 14개조에서 이상주의에 입각한 획기적인 제안은 ▲공개적인 평화협정과 비밀외교·협정 폐지(1조) ▲주권 회복을 포함한 식민지의 모든 요구에 대한 공정한 조정과 처리(5조) ▲강대국이나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연맹 창설(14조) 등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전쟁 당사국들은 14개조를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자 윌슨은 전쟁이 한창인 유럽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펼쳤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상공에 비행기를 띄워 선전물을 뿌리고 병사들로 하여금 연설문 사본을 빈 폭탄에 채워 적의 진영으로 발사하게 했다. 또한 14개조를 12개 언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써 전 세계인들도 국제연맹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게 했다. 이것은 독일 등 동맹국 영토 내의 피식민지 민족들에게 독립의 기운을 일으켜 군대의 사기를 약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4개조에 벨기에의 주권 회복,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반환, 폴란드의 독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 내 민족 문제까지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 세계 수많은 피식민지 민족은 흥분하고 열광했다.

특히 그들을 고무시킨 조항은 ‘식민지의 모든 요구에 대한 공정한 조정과 처리’를 강조한 5조였다. 윌슨은 5조에서 “주권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하는 경우, 해당 민족의 이익이 향후에 권한을 부여받게 될 정부의 정당한 요구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면서, 모든 식민지의 요구 사항에 대한 조정 과정이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절대로 편견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식민지 국민들은 윌슨을 세계평화론자나 약소민족의 수호자로 인식하고 메시아처럼 받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독일의 종전 협정에 따라 막을 내렸다. 뒤이어 승전국과 패전국 간에 손익 결산을 따지기 위해 주요 전승국을 필두로 관련 국가의 대표들이 전후의 파리로 속속 몰려들었다. 그중 가장 환영받은 인물은 당연히 윌슨이었다. 윌슨은 1918년 12월 13일 프랑스에 도착했다. 미국 대통령의 해외 방문으로는 사상 최초였다. 윌슨은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할 때마다 “유럽의 구원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평화회의가 시작되자 각국의 대표들은 윌슨이 주장해온 세계 평화나 자유처럼 막연하고 고귀한 제안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혈안이었다. 윌슨의 이상주의적 원칙은 유럽의 실리주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관습과 인습의 성벽을 허물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14개조는 승전국의 의지가 반영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변질되었고 승전국들이 보유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약소 민족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승전국들은 기존 식민지를 그대로 보유했고, 러시아에는 볼셰비키 정부를 쓰러뜨리려는 열강의 침략군이 속속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14개조는 1차대전 직후 당시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약화시키는 데만 쓰인 셈이 되었다.

 

정적들을 구슬러서 자신의 뜻 이루는 정치적 본능과 수완 없어

윌슨은 1919년 4월 파리회의에서 그나마 국제연맹 규약이 확정된 것을 위안으로 삼았으나 이 역시 미국 내 정치 현실에 부닥쳐 물거품이 되었다. 암운의 시작은 파리평화회의 전인 1918년 11월의 중간선거에서 윌슨의 민주당이 공화당에 대패한 일이었다. 야당인 공화당은 상하 양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자 국제연맹을 창설하고 미국을 가입시키려는 윌슨 외교에 반대했다. 집단안전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에 가입하면 미국이 가맹국의 내전에 간섭할 공산이 크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윌슨이 주도한 베르사유 조약 협상단에 공화당 의원이 단 1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이른바 꾀심죄도 작용했다.

윌슨은 1919년 6월 28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안을 갖고 7월 중순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다수당인 공화당은 여전히 국제연맹에 반대했다. 그렇다면 윌슨이 공화당과 타협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을 선택했다. 공화당은 의회 대신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윌슨의 전국 연설 여행에 분개하면서도 조약을 아예 반대하기보다는 윌슨이 껄끄럽게 생각할 만한 유보 조항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공화당이 제시한 유보 조항들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어서 윌슨으로선 충분히 타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윌슨이 정적들을 구슬러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정치적 본능과 수완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윌슨은 고집불통의 이상주의자여서 자신이 구상한 당초 안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결국 윌슨이 자신을 따르는 민주당 상원의원들에게 유보 조항들이 덧붙여진 비준안을 거부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9월 24일 상원에서 43대 40으로 부결되었다. 그래도 노벨상위원회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인정해 1919년 노벨 평화상을 안겨주었다.

윌슨의 판단 착오를 윌슨의 건강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윌슨은 재선 임기까지 다 채우긴 했지만 건강이 계속 악화해 파리평화회의 무렵에는 정상적인 집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1919년 9월 25일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반신이 마비되고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921년 3월 4일 휠체어를 타고 백악관을 나오긴 했으나 나날이 악화하는 건강 때문에 실의에 빠져 살다가 1924년 2월 3일에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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