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67년 : 카를 마르크스 ‘자본’ 제1권 출간과 프리드리히 엥겔스

두려움과 비난의 표적이자 선망과 찬사의 대상

인류 역사상 카를 마르크스(1818~1883)만큼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인물은 없었다. 그는 20세기 내내 한편에서는 두려움과 비난의 표적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선망과 찬사의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독일(프로이센) 남부 라인란트 지역에 자리 잡은 트리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계 혈통상 유대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의 자유주의적인 영향을 받아 개방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835년 본대 법대에 입학한 후에는 낭만적인 시들을 쓰고 무도회에 나가고 싸움질에 끼어드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836년 베를린대로 옮긴 뒤에는 전공인 법학보다 철학에 심취하고 청년헤겔학파와 어울리면서 급진적인 사상에 빠져들었다. 이로 인해 1841년 4월 예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정부의 반대로 교수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뜨거운 심장이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망명과 가난, 그리고 병으로 얼룩진 인생의 시작이었다.

마르크스는 1842년 가을부터 그해 1월 쾰른에서 창간된 반정부 기관지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당대의 정치·사회적 쟁점을 날카로운 필치로 분석하고 비판했다. 그 무렵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헤겔 철학 비판’과 ‘기독교의 본질’ 등을 읽었는데 포이어바흐는 헤겔 철학을 관념론으로 규정하며 역사의 원동력은 물질적 조건의 총합이라고 해석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이 유물론적 철학을 수용하는 데서 새롭게 출발했다. 라인신문이 프로이센 왕정 체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 문제가 되어 마르크스는 1843년 3월 신문사를 떠나고 신문은 3월 말 강제 폐간되었다.

마르크스는 1843년 6월, 귀족 출신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고 그해 10월 파리로 이주해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844년 2월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아르놀트 루게와 공동으로 파리에서 ‘독불연보’ 잡지 첫 호를 발행했으나 첫 호부터 압수되어 더 이상 발행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첫 호에 기고한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헤겔을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 변화의 주도 세력이라고 언급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등 여러 사상가들과 교류했다. 그중에는 무정부주의를 추구한 러시아의 미하일 바쿠닌과 프랑스의 피에르 프루동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1844년 ‘경제학·철학 원고’를 집필했으나 이것은 출판되지 않고 있다가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후인 1920년대에 출간되었다.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를 만나 결속을 다짐한 것도 1844년 8월 파리의 한 카페에서였다. 둘은 1842년 11월 라인신문 편집실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만남은 일회적이었다.

 

마르크스는 ‘해’, 엥겔스는 ‘달’로 비교되어

엥겔스는 프로이센 라인란트 지방 바르멘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산업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엥겔스가 고교 시절 문학에 심취하자 아들을 학교에서 자퇴시킨 뒤 자신의 방직공장 경영 수업을 받게 했다. 엥겔스는 1841년 군에 입대해 베를린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베를린대를 드나들며 알게 된 청년헤겔학파를 통해 반체제 철학에 눈을 떴다.

아들의 일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군사훈련을 마친 엥겔스를 1842년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자신의 방직공장으로 보냈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미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를 만나 의기투합하고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엥겔스의 헌신과 경제적 도움이 없었더라면 마르크스는 그 엄청난 이론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고 마르크스가 없었더라면 엥겔스는 한 세기를 휩쓴 정치 운동의 상징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20세기 혁명사에 길이 빛나는 수많은 논문과 팸플릿 등 각종 저작에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올라 있다는 점에서도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수한 관계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마르크스는 ‘해’로, 엥겔스는 ‘달’로 비교되거나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그림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20세기 인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방대한 규모의 ‘자본’을 저술·기초하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1845년 2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했다. 영국으로 잠시 돌아갔던 엥겔스는 당대 산업화의 정점이자 세계 최대 공업도시였던 맨체스터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1845년 ‘영국 노동계급의 실태’를 집필한 뒤 브뤼셀로 가 마르크스와 합류했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신성가족’(1845),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를 집필했는데 처음으로 유물사관이 제시되었다. 마르크스는 1847년 6월 런던에서 결성된 최초의 국제공산주의 비밀결사인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사상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동맹의 목적을 선명히 밝힌 문서가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당 선언’은 1847년 11월에 개최된 공산주의자동맹 2차 대회 후 이 조직의 강령으로 작성되어 1848년 2월 런던에서 발표되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프롤레타리아들이여, 그대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세상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었다. ‘공산당 선언’은 점차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그것이 출판된 나라마다 맹렬한 추종자가 생겨 19세기 말~20세기 초는 그가 뿌린 혁명의 씨앗으로 전 세계가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발표 후 또다시 문제 인물로 낙인찍혀 벨기에에서 추방되자 독일로 돌아와 엥겔스와 함께 ‘신라인신문’을 창간하고 ‘임금, 노동, 자본’을 비롯해 수많은 논문을 썼다. 결국 또다시 요시찰 제1호로 지목되어 신문은 폐간되고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추방되었다. 엥겔스 역시 체포령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1849년 8월 마르크스 가족이 런던으로 망명했을 때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 공장의 공장주로 있었다. 엥겔스는 영국에서 낮에는 자본가로 일하면서 밤에는 자본가들의 노동 착취를 비판하는 혁명가라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생활을 했다. 가슴속에서는 혁명을 향한 열정이 활활 타오르면서도 부르주아답게 상류층의 스포츠인 여우 사냥을 다니고 최고급 포도주를 즐겨 마셨으며 매력적인 여성들과 유흥을 즐겼다. 엥겔스는 이런 이중생활이 싫었으나 당장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장주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끊임없이 생활비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엥겔스는 공장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수입으로 마르크스 일가의 생계를 책임졌다. 게다가 엥겔스가 자신의 공장과 악명 높은 공업도시 맨체스터에서 건져 올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생생한 관찰과 통계는 마르크스가 이후 ‘자본’을 집필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인용되었다. 자본주의의 맨 얼굴을 그대로 들여다본 자본가로서의 경험과 공장 생활, 빈민가 체험, 무장봉기 참여 등 엥겔스의 다양한 이력 역시 ‘자본’에 녹아들어갔다.

마르크스는 1850년 가을부터 거의 매일 대영박물관 도서관을 드나들며 경제·역사·정치·민족학·인류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책과 자료를 통독하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자본’의 설계도 격인 ‘정치경제학 비판’(1859)은 물론이고 1867년 4월 제1권이 출간된 마르크스의 최고 역작 ‘자본’ 역시 그 성과물이었다.

마르크스는 집필에 몰두하면서도 1864년 런던에서 조직된 국제공산주의 단체인 ‘제1인터내셔널’의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등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본’ 제1권은 난해함 때문에 발간 초기에는 별 호응이 없었으나 점차 진가를 인정받아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된 20세기에는 ‘성전’으로 격상되었다.

1850년대 가난에 찌든 마르크스의 유일한 수입원은 1851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통신원 원고료였다. 엥겔스도 부친의 맨체스터 공장주로 활동하며 벌어들인 수입으로 마르크스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마르크스 가족들은 늘 궁핍하게 살았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낭비벽이 심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기 때문에 1850~1860년대에 마르크스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양실조와 열악한 환경으로 6명의 자녀 중 2명은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고 1명은 8살에 죽었다. 게다가 마르크스마저 병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고리대금업자의 빚에도 쪼들리게 되자 ‘자본’은 그들을 향한 증오들로 가득했다.

 

엥겔스의 독자적인 삶은 마르크스가 죽고 난 뒤 열려

마르크스의 가족은 빈곤과 망명 생활이 주는 고통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이것을 제외한다면 행복한 가정이었다. 마르크스는 부인 예니를 사랑으로 감싸고 보듬었으며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산책이나 소풍을 갔다. 그러나 예니의 얼굴에서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묵인 하에 집안의 가정부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다가 급기야 1851년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니는 엥겔스와 함께 그 비밀스러운 불륜을 감추는 작업에 동참했다. 마르크스도 자신의 아들임을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다른 집에 맡겨져 엥겔스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아들의 존재는 1895년 엥겔스가 죽기 전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엥겔스는 아일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 여성과 20여 년간 동거했을 뿐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 여성이 죽은 뒤에는 그녀의 여동생과 다시 15년을 살았다.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에 시달리던 엥겔스는 1869년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장사’를 그만두고 1870년 마르크스의 집 근처로 이사해 마르크스가 쓴 강령을 집행하는 실무자로 나섰다.

마르크스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지속적으로 집필을 하지 못했다. 1881년 12월 부인 예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가운데 1883년 1월 초에는 큰딸 예니(어머니와 동명)마저 병으로 죽어 마르크스는 또다시 큰 충격에 빠졌다. 1883년 3월 14일에는 마르크스마저 폐렴으로 숨져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엥겔스의 독자적인 삶은 1883년 3월 마르크스가 죽고 난 뒤 열렸다. 하지만 그 삶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전파하고 굳게 뿌리내리게 하는 데 바쳐졌다. 엥겔스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조직을 건설·강화하고 전략·전술을 고안해 막후에서 조종하는 데 몰두하면서도 마르크스가 초고 상태로 남기고 간 ‘자본’의 원고들을 정리해 제2권(1885), 제3권(1894)으로 출간했다.

1889년에는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 분파를 아울러 새로운 국제노동자협회(제2인터내셔널)를 결성했으며 1890년대 들어서는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걸맞게 독일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 전략을 적극 지지했다. 1895년 8월 6일 숨졌을 때는 마르크스 옆에 눕는 대신 화장해 바다에 뿌려지도록 했다. 마르크스의 권위와 영광을 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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