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박은식 ‘한국통사(痛史)’ 출간

우리는 왜 어떻게 망했는가를 서술

박은식(1859~1925)은 열렬한 독립투사이자 뛰어난 민족사학자였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해 동네 신동으로 불렸다. 10대 후반에는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과 더불어 ‘황해도의 두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20대 초반 정약용의 제자에게서 실학을 배우기도 했지만 20대 중반 이항로의 제자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뒤로는 위정척사파 유학자 계열에 속했다.

1882년 7월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도하고 정부와 고종에게 시무책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실망하고 낙향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질책을 받아 1885년 향시에 합격하고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날 때까지 관직에 몸을 담았다. 그는 급변하는 세상을 위정척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구를 의리로 삼고 개화를 ‘사설(邪說)’이라고 배척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이 학정에서 기인한 것임을 지적하면서도 “동비(東匪)들의 반란”이라고 개탄했다. 갑오경장은 “사악한 변개”라며 폄하했다. 이후 사상과 행동에 대전환이 없었다면 박은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위정척사파의 한 사람으로 홀로 만족하며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은식은 점차 위정척사에 회의를 품고 신학문과 신지식으로 관심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근대 민족운동에 뛰어들고, 1898년 9월 창간된 황성신문에서 장지연과 함께 주필로 활동하며 민중 계몽운동을 펼쳤다. 1904년 7월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에서도 주필로 활동했으나 1905년 11월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장지연이 황성신문에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다시 황성신문으로 옮겨 191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애국적 논설로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박은식은 국망의 위기 속에서 국권 회복 운동의 논리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다방면에 걸쳐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했다. ‘대한자강회’에 참여하고 교육 계몽운동 단체 ‘서우학회’를 조직했으며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담했다. 지석영 등이 조직한 ‘국문연구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한 ‘서북학회’를 지도했다. 1908년 1월엔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10년 8월의 한일합방은 애국 계몽운동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을 비롯해 각종 신문·잡지가 폐간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국혼이 들어 있는 국사서들은 압수·소각되었다. 박은식의 저서들도 금서가 되었다.

박은식은 1911년 4월 부인이 병사하자 장례를 치른 뒤 민족혼을 진작할 목적으로 중국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했다. 독실한 대종교(단군교)의 신도이자 후에 대종교 제3세 교주가 될 윤세복의 집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역사서를 저술하고 이를 우리 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삼았다. 민족의 영걸과 관련된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천개소문전’ 등이 이때 저술되었다. 박은식은 윤세복의 영향을 받아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2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와 동포들의 자제 교육을 위해 상해에서 결성된 ‘박달학원’ 설립에도 신규식·신채호·조소앙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15년 3월엔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 결성에 참여하고 1917년 7월 신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모든 생을 조국과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다 바쳐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는 1915년 상해의 중국 출판사 대동편역국에서 간행되었다. 한문으로 쓰인 한국통사는 대원군의 집정이 시작된 1864년부터 ‘105인 사건’이 일어난 1911년까지 47년간의 뼈아픈 망국사를 일반정치사, 일제 침략사, 독립운동사로 구분한 뒤 하나의 체계로 묶어 기술한 3편 114장의 대작이다. 박은식은 대원군과 관련해서는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 강화를 위한 내정 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국제 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탓에 도약의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한국의 통사(痛史)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한국통사에서 박은식은 민족국가의 구성을 ‘국혼(國魂)’과 ‘국백(國魄)’으로 구분했다. ‘국혼’은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 등으로 구성되며 ‘국백’은 전곡(錢穀·돈과 곡식), 졸승(卒乘·군대), 성지(城地), 함선, 기계 등으로 이뤄진다. 나라가 독립(생존)해 있다는 것은 국혼과 국백이 하나로 융합·통합되어 있음을 말하는 반면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국혼과 국백이 분리되어 국백이 다른 민족에게 정복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국백은 다른 민족에게 정복당해 소멸될 수는 있어도 국혼은 나라가 멸망해도 바로 소멸당하지 않고 일정 기간 존속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잃어도 국혼만 잘 보존·강화·발전시키면 독립 투쟁을 전개해서 다시 나라의 독립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국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은식에 따르면 ‘역사’가 바로 국혼이 머물고 보존되는 곳이다.

한국통사는 간행되자마자 전 세계 한국인 동포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미국에서는 순국문으로 번역되었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어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신음하는 한국 민족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일제는 한국통사의 간행에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일제 어용 사학자들을 동원해 1916년 조직한 것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개칭)이고 이곳에서 편찬한 책이 ‘조선반도사’(후에 조선사로 개칭)다.

박은식은 후속작으로 1920년 12월 상해의 한국인 출판사 유신사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 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한국통사(痛史)’가 우리는 왜 어떻게 망했는가를 서술한 책이라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血史)’는 어떻게 왜 싸웠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즉 ‘통사’는 나라 잃은 눈물의 기록, 통탄의 역사이고 ‘혈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피어린 투쟁의 기록이다.

박은식은 분열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24년 6월 ‘이승만 대통령 유고안’을 결의한 임시 의정원에 의해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할 원로로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되고 1925년 3월 ‘임시 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이 통과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은식은 곧바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 성격의 국무령제로 헌법을 개정해 1925년 7월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4개월 뒤인 1925년 11월 1일 66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했다. 정통파 주자학자로 출발해 개화자강파로, 위대한 애국계몽 사상가로, 대학자로, 언론인으로, 교육자로, 불굴의 독립투사로, 한국 민족이 처한 조건의 변동에 따라 자기의 사상과 행동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생을 조국과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다 바치고 생을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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