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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만에 떠난 평균 59세 네 남매의 여행… 경북 봉화 석천계곡-청암정

↑  청암정 모습. 경치가 워낙 빼어나다 보니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by 김지지

 

자 출발이다!

행선지는 경북 청송의 주왕산과 주산지다. 문제는 이곳이 가을 단풍으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공휴일에는 인파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결론은 공휴일을 피한 월요일 산행이다. 주왕산은 서울에서 멀다. 315㎞나 떨어져 있고 4시간이나 걸린다. 따라서 1박이 필수다. 그렇다면 주왕산 부근에서 1박하는 그날 낮에 또 다른 명승지를 둘러보는 것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경북 봉화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는 형의 제안에 따라 봉화가 후보지로 정해졌다. 봉화에서도 석천계곡․청암정과 청량산이다.

일행은 4남매다. 나를 기준으로 하면 은행 지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 지금은 틈틈이 강원도 치악산 부근에서 소나무와 벗삼아 사는 62세 형, 노인복지센터를 운영하는 58년 개띠인 60세 누나, 법무사로 활동 중인 56세 막내 여동생, 그리고 신문사에 근무하는 58세의 나, 이렇게 넷이다. 여행기 제목에서 ‘56년만’이라고 한 것은 막내가 56세이고 우리 남매는 56년 동안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없어서다. 여행을 다녀와 지인들에게 네 남매가 1박 여행을 하고 왔다니 부러워하는 눈치다. 한 선배는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우애가 있는 남매를 키웠으니 어머니가 장한 분”이라며 치켜세운다. 선배는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주위를 둘러보면 형제들끼리 재산과 종교로 인한 분쟁은 물론 배우자들끼리의 갈등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평균 나이 59세인 네 남매가 집을 나선 것은 2018년 11월 4일 일요일이다. 내가 아침 7시 서울 마포 집을 떠나 반포에 사는 누나를 픽업한 뒤 동생이 사는 경기도 수지로 가 그곳에서 동생·형과 합류했다. 고속도로로 3시간 정도 지나 봉화에 다다르니 배꼽시계가 아우성이다.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억지춘양시장의 한 식당에서 곱창전골로 배를 채웠다. 식당은 단촐하면서도 깔끔하다.

첫 일정은 봉화군의 석천계곡 하류를 출발해 석천정사를 지나 청암정이 있는 계곡 상류의 닭실마을로 걸어가는 것이다. 석천계곡과 청암정은 국가명승 60호로 지정되고 봉화군이 선정한 봉화8경 중 제3경으로 선정될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출발 전, 먼저 둘러보면 좋은 곳이 있다. 석천계곡 입구 부근에 자리잡은 삼계서원이다. 뒤에서 자세히 소개할 중종 때 문신인 권벌(1478~1548)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88년(선조21년) 봉화읍 삼계리에 지어졌다. 1660년(현종1년) ‘三溪(삼계)’라는 이름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은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68년 철폐되었다가 1951년 복원되었으나 조잡스럽고 흉물스러워 최근 허물고 다시 목조로 지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삼계서원은 1895년 을미의병에서 안동유림들이 격문을 작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석천계곡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초입에 ‘설죽의 시향에 취하다’라는 제목으로 설죽이라는 조선조 여류시인의 한시들을 소개하는 10여개의 작은 플랭카드가 펄럭였다. 그런데 설죽이 도무지 낯설다. 우리가 알만한 조선시대의 여류 시인이라 하면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정도다. 매창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매창을 알 정도의 사람이라면 나름 인문학에 밝은 사람이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사대부 집안의 여성이고 황진이와 매창은 기녀 시인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설죽을 찾아봤다. 생몰연대가 미상인데도 한시에 출중한 인물이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몸종 출신의 여류시인 설죽

설죽은 봉화 닭실마을에 거주하는 권래(1562~1617)의 여종이었다. 권래의 조부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권벌(1478~1548)이고 부친은 권동보(1517~1591)다. 시로 문명을 떨친 권필의 인척이었으며 권필의 절친인 성로(1550∼1615)와는 송강 정철에게서 동문수학했다. 성로는 아내와 사별 후 권필이 사는 닭실로 놀러 갔다. 그곳에서 권래의 여종인 10대 중반의 설죽을 만나 한눈에 반했다. 그때 성로는 50대 중반이었고 설죽은 10대 중반이었다. 권필은 성로의 마음을 알아채고 권래에게 부탁해 설죽을 성로의 비첩(여자 종으로 첩이 된 사람)으로 보냈다.

성로는 설죽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살았으나 10년만에 죽어 설죽은 20대 중반에 혼자가 되었다. 이후 설죽의 행적은 지금의 충청도를 일컫는 호서지방에서 보인다. 각종 일화를 소개한 조선 중기의 수필집 ‘패관잡기’ 등의 문헌에서 호서 기생으로 등장한다. 설죽은 20년 정도 호서지방에서 기생으로 살며 명산대첩을 노닐다가 40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와 고향 닭실을 그리워하는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언제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생전에 남긴 시가 167편이나 되어 오늘날까지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1750년 쯤 간행된 권상원의 유고 시집 ‘백운자시고’에 166수, 조선 후기 이덕무의 저술 총서인 ‘청장관전서’에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대 여류시인과 작품을 통산하면 대략 200여 명이 2000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그중 167수가 설죽의 한시라니 대단한 시인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조 규방문학의 대표인 허난설헌이나 기생문학의 상징인 황진이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더욱이 미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사대부들의 어깨너머로 글과 시를 쓰는 법을 터득하고 시문에 뛰어났다는 것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백운자시고’ 말고도 시화를 모아 엮은 홍만종의 ‘시화총림’, 임방의 시화집 ‘수촌만록’에서 설죽을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설죽은 당시에도 이미 널리 알려진 문인이고 작품 또한 매우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설죽이 감정을 절제하고 홀로 아픔을 감내하며 인고하는 한국 여성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시에 담아 조선 여류 시문학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석천계곡과 석천정사 가는 길…  송림과 기암 어우러진 아늑한 숲속길

석천계곡, 석천정사, 닭실마을, 청암정을 둘러보는 방법은 석천계곡 하류에 조성된 공용주차장에서 출발해 닭실마을로 걸어 올라가는 하는 코스와 닭실마을에서 석천계곡으로 내려가는 역순 코스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왕복하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두런두런 얘기하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어가도 2시간이면 족하다. 우리는 석천계곡에서 닭실마을로 올라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석천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골이 깊지 않아 누구나 쉽게 다닐 수 있는 아늑한 숲속길이다. 수림은 울창하고 풍광은 수려하다. 소나무 숲과 기암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석천계곡. 수림은 울창하고 풍광은 수려하다.

 

석천계곡을 거슬러 몇분 쯤 올라갔을까. 바위에 붉게 새긴 ‘靑霞洞天(청하동천)’ 글씨가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석천정사의 풍경이 아름다워 도깨비들이 모여 놀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권벌의 5세손인 권두옹이 바위에 초서체로 ‘靑霞洞天’이란 글자를 새기고 붉은색으로 칠을 하니 도깨비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초서로 쓴 글씨가 도깨비같이 생겼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뜻한다.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경관이 빼어난 마을 입구에 신선들이 노닐던 별천지라는 의미의 ‘동천’을 조성해 동천은 전국 곳곳에 있다.

청하동천에서 다시 5분 정도 올라가니 계곡 우측에 ‘석천정사’가 나타난다.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아름다운 암석으로 경관이 빼어나다. 그래서 석천정사 앞 너른 반석 일대에는 여름이면 물놀이를 즐기는 주민들로 늘 붐빈다고 한다.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권벌의 아들 권동보가 지었다. 석천정사 앞에는 목재 징검다리가 있다. 소나무, 물길, 정자와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석천정사는 정자라고는 하지만 전체 34칸의 큰 건물이다.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건축 재료는 그 유명한 춘양목을 썼다. 개울에 면한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 뒤편 큰 바위 한 면에 ‘石泉亭(석천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석천정사 현판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일중이 썼다. 추녀 끝에 있는 수명루(水明樓)와 계산함휘(溪山含輝)는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이정신의 글씨이다.

석천정사
청암정 품고 있는 닭실마을은 손꼽히는 전통 마을

석천정사를 뒤로 하고 숲길을 걸어 올라가니 이내 너른 논이 펼쳐지고 건너편 닭실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논을 에둘러 가도록 만든 도로를 걸어 마을로 다가가니 마을 입구의 가로등 위에 닭 모양의 모형이 걸려있어 이곳이 닭실마을임을 알려준다.

닭실마을은 14세기 후반에 조성된 안동 권씨의 세거지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통 마을 가운데 하나다. 부드러운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있고 우거진 솔숲 앞에는 기와집이 터를 잡고 있으며 마을 앞 너른 들판은 풍요로워 보인다. 마을 서쪽 산에서 바라보면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을 의미하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지세라고 해서 닭실마을로 불리나 그곳 사람들은 경상도 사투리인 ‘달실’로 발음한다. 법정 지명은 닭유(酉)자를 써서 유곡리(酉谷里)리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지역의 4대 길지로 꼽았다. 닭실마을은 원래 안동 관할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닭실마을을 포함한 10개 문중 지역이 봉화로 편입되었다. 닭실마을은 중종 때 문신인 권벌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잡았다. 이 지역이 집성촌으로 번창한 것은 권벌(1478~1548) 이후다.

닭실마을 전경. 봉화8경 중 제3경으로 선정될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권벌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507년(중종2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서 활동하던 중 1520년(중종15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자 닭실마을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에 매진했다. 55세인 1533년 복직되어 67세인 1545년 의정부의 종1품 관직인 우찬성에 올랐으나 그해 일어난 을사사화로 또다시 파직되고 2년 뒤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1548년 그곳에서 작고했다. 권벌의 종가는 닭실마을의 중심지로 전형적인 영남 반가의 ㅁ자 집이다.

종가 왼쪽으로 1526년(중종21) 권벌이 지은 청암정(靑巖亭)과 정원이 있다. 청암정을 에워싸고 있는 정원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3칸 건물로 지어진, 권벌의 호에서 이름을 딴 개인서재 ‘충재(冲齋)’가 눈에 띈다. 간결하고 단아하다. 청암정은 정원 오른쪽에서 우리를 반긴다.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丁자형 정자로, 냇물을 끌어 올려 연못(척촉천)을 파고 조촐한 돌다리를 놓았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여있는 형상이다. 청암정에 오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허목이 전서체로 쓴 글씨이다. 바위에는 권벌의 아들 권동보가 쓴 ‘청암정’ 각자가 있다. 정원 안에는 향나무, 왕버들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철쭉, 나리꽃들이 심어져 청암정의 운치를 한껏 살리고 있다. 청암정의 경치가 워낙 빼어나다 보니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았다. ‘동이’ ‘스캔들’ ‘바람의 화원’ ‘정도전’의 일부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런데 청암정 돌다리 위에 세워진 ‘출입금지’와 ‘금연구역’ 입간판이 볼썽사납고 흉물스럽다. 출입을 막은 이유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입간판이 워낙에 조잡스러워 청암정의 멋진 모습을 방해하고 있다. 후손이든 관리사무소 직원이든 그들의 무성의와 무신경이 안타깝다.

청암정 앞에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충재박물관이 있다. 안동권씨 충정공파 집안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보물 제261호로 지정된 ‘충재일기’, 권벌이 중종에게서 하사받아 늘 지니고 있던 보물 제262호 ‘근사록’(1370년경 간행)을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집안의 고서적, 고문서들이 가득하다. 청암정 안에 걸려 있던 퇴계 이황이 지은 ‘청암정제영시’와 석천정사에 있던 권동보가 지은 ‘제석천정사’ 편액과 현판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청암정 모습. 경치가 워낙 빼어나다 보니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았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아시아 최대 자랑하지만 고목·거목 없어 아직은…

첫째날 오후에 가려던 청량산이 형의 제안에 따라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바뀌었다. 첫 삽을 뜬지 7년만인 2018년 5월 정식 개원한 백두대간수목원은 경북 봉화군의 옥석산과 문수산 일원에 걸쳐 있다. 강원도 영월군과 태백시, 그리고 경북 봉화군이 접하고 있지만 주 입구는 봉화군 춘양면 쪽에 있다. 전체면적 5,179ha 중 206ha를 중점 조성해 개방했는데 수목원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설립 목적은 한반도 생태계의 보고이자 생태축인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희귀 특산식물과 고산식물을 수집·증식·보전하기 위함이다. 현재 2,100여종의 식물종, 3,200여종의 식물종자를 보전하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는 각종 식물들이 27개 주제별 정원으로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꽃나무원, 잔디언덕, 돌담정원, 거울연못, 야생화언덕, 매화원, 관상침엽수원, 사계원, 단풍식물원, 백두대간자생식물원, 백두대간야생초화원 등이다. 백두산호랑이의 보금자리인 호랑이숲은 백두대간의 상징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호랑이에 적합한 환경조성을 통한 백두산호랑이 종 보전을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실제로 백두산 호랑이 두만(수컷·17살)과 한청(암컷·13살), 우리(수컷·7살)가 이곳에 산다. 다른 동물원과 달리 축구장 7개 넓이인 4.8㏊ 크기의 숲을 조성해 자연을 최대한 모사했다. 수목원에는 2018년 11월 현재 155과, 511속, 2,037종, 3,863,907본이 있다. 27개 주제별 정원을 모두 관람하려면 3시간 정도 걸린다. 노약자나 아이들을 위해 트램도 운영하고 있다.

수목원의 최대 자랑거리는 야생식물 종자의 영구저장을 위해 만든 ‘시드볼트(씨앗금고)’다. 안정성 확보를 위해 지하 46m 지점에 4300여㎡ 크기로 지어졌다.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로 생존위협을 받고 있는 백두대간 지역의 고산식물과 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아시아 지역 식물 종을 수집해 장기적·안정적으로 영구 보전하고 관련 연구를 수행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가히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 할만하다. 현재 종자 4만6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2030년까지는 전 세계 식물 종자 12만 점을 확보할 계획이다.

봉화는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언급된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두 번째로 꼽히는 곳이다. 십승지는 흉년, 전염병, 전쟁과 같은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는 점에서 이곳에 시드볼트를 세운 것은 나름 그럴듯하다. 다만 수목원이라면 으레 떠오르는 고목이나 거목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은 최근에 심은 나무들이나 다년생 풀이었다. 경기 포천의 광릉수목원까지는 아니래도 숲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에 조성한 것이니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다. 문제는 수목원의 틀이 제대로 갖춰지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입장객한테 5000원(성인기준)씩 받는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는 현실에서 유료화는 아직 성급해 보인다. 우리는 수목원을 등지고 주왕산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대명콘도에서 1박을 했다. 1년 전 세워져서인지 호텔처럼 깔끔하고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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