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홍길동전’의 저자는 허균이 아니고 최초 한글소설도 아니라는데

‘홍길동전’은 어떤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는 허균이 아니고 최초 한글소설도 아니라는 주장을 전문학자가 제기하면서 관련학계는 물론 일반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홍길동전’을 40년간 연구해온 전문학자가 구체적인 논거를 들어가며 제기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다.

최근 이 문제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 학자는 이윤석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다. 그는 2018년 발간한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한뼘책방)에서 자신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혔다. 주요 내용은 ‘홍길동전’은 ▲1800년 무렵 이름 없는 어느 평민 작가가 썼고 ▲최초의 한글소설도 아니며 ▲사회 개혁이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신분 상승 소망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홍길동전’은 어떤 소설일까. ‘홍길동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만화와 영화로 수없이 제작되고 중고교에서 ‘홍길동전’을 계속 가르치는 게 주요 이유다. 현행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는 “저자는 허균. 최초의 한글소설. 주제는 적서 차별 타파”라고 기술하고 있다.

‘홍길동전’은 양반가에서 서얼로 태어난 홍길동의 일대기를 그린 한글소설이다. 서얼은 첩의 자식을 뜻하고 서자와 얼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서자는 양민인 첩의 자식이고 얼자는 천민인 첩의 자식이다. 홍길동의 모친은 천민이었기 때문에 홍길동을 얼자라고 해야 하나 이 글에서는 얼자와 서자를 아우르는 서얼로 통일한다.

홍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인재가 될 자질을 인정받았으나 서얼이라는 이유로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하는 즉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한을 품는다. 가족 중 일부가 홍길동의 이런 비상한 재주가 장차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없애려고 했으나 홍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 도적의 길로 들어선다.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무리의 이름은 가난한 백성들을 살려 준다는 뜻의 ‘활빈당’이라 칭했다. 홍길동은 탐관오리를 물리쳐 고통받는 민초들에게 대리만족과 통쾌함을 안겨 주고 꿈과 희망을 주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홍길동전’이 그토록 오랫동안 민중의 사랑을 받은 이유를 신분제 모순 비판, 적서차별 철폐, 탐관오리 응징, 봉건 체제 비판, 해외 이상국(율도국) 건설 등을 활극풍의 서사로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홍길동전’에서 또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 홍길동(洪吉童)이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 등에 기록된 실존 인물 홍길동(洪吉同)을 모델로 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실제로 실존 인물 홍길동이 도적이라는 점, 관리들을 꼼짝 못하게 한 점, 일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 서얼(추정)로 태어났다는 점 등이 소설 속의 홍길동과 흡사하다. 실존 인물 홍길동은 연산군일기 5회, 중종실록 4회, 선조실록에 1회 등장한다. 그래서 실존 인물 홍길동의 고향인 전남 장성군은 홍길동 테마파크를 만들어 홍길동을 관광상품화 했다.

 

‘허균 창작설’ ‘최초 한글소설’의 근거는?

‘허균 창작설’의 구체적인 근거는 단 하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식(1584∼1647) 사후에 발간된 시문집 ‘택당집’(1674년)에 관련 내용이 실렸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 말고 나머지는 모두 정황상 추론이다. 물론 추론도 믿을만한 요소들에 기초하고 있고, ‘택당집’도 16세기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나름 신빙성이 높다는 점에서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택당집은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도적이 된 사람들은 그 책(중국의 ‘수호전’)을 좋아하는데, 허균·박엽 등도 그 책을 좋아해서 그 도적의 우두머리로 각각 호(號)를 삼아 서로 즐거워했다.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수호전’을 모방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국문 소설(한글소설)이라는 기록은 없어 연구자들 사이에 “혹시 한문소설이 아니냐”는 의문 제기는 여전하다.

이윤석 교수의 저서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

현재 ‘홍길동전’의 원본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이본만 30여 종 전해온다. 한결같이 19세기 중반 이후의 판본이다. 허균이 저자라는 사실도 책에는 없다. 호러스 알렌이 ‘Korean tales’(1889년)과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1894년)에도 ‘홍길동전’이 실려있으나 여전히 저자는 소개하지 않고 있다. 최남선이 문고본 소설로 1913년 발간한 ‘육전소설’ 중 하나인 ‘홍길동전’에도 허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다가 허균이 저자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이는 1927년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다. 그는 ‘택당집’을 근거로 ‘허균 창작설’을 주장했다. 그러면 왜 다카하시 전에는 왜 허균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한문으로 된 ‘택당집’과 한글로 쓰여진 ‘홍길동전’의 독자층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허균을 홍길동의 저자로 보는 추론은 허균의 삶이 소설 속 주인공인 홍길동의 삶의 궤적과 너무 유사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소설의 시대 배경과 내용 속에 나타난 여러 사상이 허균이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한 사상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 것도 중요 이유 중 하나다. 허균은 서얼들이 차별받는 잘못된 현실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저서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허균 창작설’을 부정하는 근거는?

이윤석 교수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홍길동전’ 작품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허균(1569∼1618)은 16세기 인물인데 1692년(숙종 18년)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도적 장길산을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이라며 ‘옛날 사람’으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허균의 문집 어디에도 ‘홍길동전’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근거의 하나로 작용한다. 또한 ‘택당집’의 기록은 저자인 이식이 죽고 난 후 송시열이 교정·편찬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지고, 허균이 처형될 때의 죄목에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것도 의문제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홍길동전’과 같은 형식의 한글소설이 등장한 것이 19세 이후라는 사실도 ‘허균 창작설’을 부정하는데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당연한 상식도 논쟁 중이다. ‘홍길동전’이 최초 한글소설이란 평가는 1948년 출간된 이명선의 ‘조선문학사’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명선의 기술이 어떤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광해조에 이르러 허균의 홍길동전이 나와, 이것이 조선말로 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한다’는 전언 형식이라는 것이다.

‘홍길동전’을 둘러싼 또 다른 쟁점은 소설의 주제가 알려진 대로 계급과 적서 차별 타파냐는 것이다. 이윤석 교수에 따르면, 이런 사실을 처음 부각시킨 사람은 훗날 남로당 간부가 된 국문학자 김태준이다. 그가 1933년 ‘조선소설사’에서 ‘홍길동전’이 계급 타파와 적서 차별 폐지, 빈민 구제, 새 사회(율도국) 건설 등을 내세운 ‘사회 혁명적 소설’이었다고 처음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대해 이윤석 교수는 반역죄로 사형당한 허균이 세상을 뒤집는 책을 썼다고 믿고 싶고, 한글소설의 등장 시기가 앞당겨진다는 ‘애국적’ 연구 태도가 한몫해 역사를 보고 싶은 대로 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홍길동전’을 둘러싸고 저자, 한글소설, 주제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홍길동전’은 천대받던 한글로 적서차별의 문제를 꼬집은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민의 정서와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후대 소설 창작에 큰 영향을 주고, 서민들에게 널리 읽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후대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도 ‘홍길동전’에 내려진 호평가다.

 

자유분방하고 개혁적인 허균의

허균(1569∼1618)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 자유분방하고 직선적이고 개혁적 기질이 뚜렷했다.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바꿔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역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능지처참으로 생을 마쳤다. 능지처참은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극형이다.

허균의 이런 비극적인 생애는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不與世合)’하는, 즉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그리고 자유분방한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허균의 이런 기질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재능과 문장과 식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해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남부럽지 않은 명문가였다. 큰형과 둘째형은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누나 중 한 명은 조선시대 최고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이다. 허균은 외가인 강릉 사천면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다. 마치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이라고 해서 교산(蛟山, 蛟는 이무기란 뜻)으로 불렸다. 야산의 능선은 바다로 사라지고 백사장에 커다란 바위들이 앉아 있는데 지금은 이무기가 튀어나와 바다로 사라졌다고 해서 ‘교문암(蛟門岩)’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겠지만 연구자들은 이상을 펴지 못한 채 처형된 허균의 삶과 결국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연결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허균은 둘째형의 친구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이 처한 답답한 현실은 허균에게 서얼의 설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허균

 

허균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에 얼마든지 입신양명할 조건을 갖추었으나 자신의 신분적 특권에 연연해 하지 않고 자신의 기질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첫 번째 선택은 자유분방한 삶이었다. 허균은 28세 때인 1597년(선조 30)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다음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파직과 복직이 되풀이되는 삶의 연속이었다.

황해도 도사 시절인 1599년 한양에서 데리고 온 기생·무뢰배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6개월만에 파직된 이래, 불교를 믿는다는 등 각종 이유로 수안군수, 삼척부사, 공주목사직에서도 파직되는 등 모두 6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유배를 떠나기도 했는데 유배지에서도 조선시대 미식의 기록이라 할, 자신이 예전에 먹었던 팔도의 별미를 열거한 ‘도문대작’을 저술할 정도로 태평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어울린 부류 중에는 기생과 서얼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는 기생을 가까이 할 때마다 세간의 눈총을 받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렸다. 그의 문집에도 그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는 여러 기생들이 등장한다. 부안 기생 이매창이 죽었을 때는 추모의 시를 짓기도 했다.

허균의 삶에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서얼들이 받고 있는 온갖 설움과 아픔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는 스승을 통해 서얼의 차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서얼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명분과 신분 차별을 옹호하는 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정착되면서 적자와 서얼의 차별이 보다 분명해졌다.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서얼의 과거 응시를 금지해 영구히 등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허균은 명문가의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로 양반도 평민도 아닌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하고 관계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냥 묵과하지 않았다. 이로인해 맞게 될 정치적 위기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허균의 비극적인 죽음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강변칠우는 광해군 역시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서자인 것을 알고 있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광해군에게 서얼허통(庶孼許通) 즉 서얼들도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스스로를 죽림칠현이라 부르며 경기도 여주 여강 변에 토굴을 짓고 음풍농월하며 살았다. 역사는 그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부르고 있다. 허균은 벼슬길이 막힌 것을 한탄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는 그들과 친밀하게 어울리며 함께 세상을 탓했다.

강변칠우는 나무꾼, 소금장수 따위를 가장해 강도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 봄에는 경북 문경새재에서 은을 싣고 가던 상인을 죽이고 수백냥어치 은을 탈취했다. 신출귀몰하는 이들을 잡아 문초하니 고관대작의 서자들이었다.

강도 사건은 곧 ‘계축옥사’로 비화했다. 내막은 이랬다. 당시 실권파인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고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했다.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이자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뒤를 캤으나 결정적인 구실을 잡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강변칠우가 은상(銀商)을 살해한 죄로 포도청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대북파는 강변칠우에게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실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할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는 허위 자백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꼬드겼다.

곧 그들의 자백에 따라 피비린내가 장안을 진동했다. 역사에서는 계축옥사 혹은 칠서지옥으로 기록되었다.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당해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가 8살에 살해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강변칠우도 1~2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해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허균은 강변칠우와 친밀했으니 당연히 요주의 인물로 의심을 받았다. 허균의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허균으로서는 자신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후원군이 절실했다. 허균이 도움을 청한 인물은 당시 대북세력의 실력자이자 글방 동문인 이이첨이었다. 허균은 이이첨의 후원 속에 집권 대북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대북세력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덕분에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의, 형조참의를 거쳐 1617년 정2품 관직인 좌참찬에까지 올라갔다. 1614년과 1615년에는 두 차례나 명나라 사행길도 다녀왔다.

그러자 지나친 자신감이 화를 불렀다.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는 정치적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인목대비의 폐비는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한 사안이었다, 한때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기자헌까지 폐비에 반대했다가 허균과 사이가 틀어져 유배되었다.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일견 허균의 승리로 보였으나 실은 몰락의 시작이었다. 허균은 곧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의 배척을 받았다.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은 1617년(광해군 9) 12월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올렸다.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도모했다는 상소였다. 허균은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인목대비 폐출을 반대하던 각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수세에 몰렸다.

홍길동전 이본의 하나. 국립한글박물관 전시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 허균의 역모를 확증하는 격문이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붙었다. 그런데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이 온다’며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격문이 허균의 측근이 한 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허균은 결백을 주장하고 모함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를 변호하는 이가 없어 결국에는 1618년 8월 24일(음력) 능지처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허균의 역모가 사실인지 여부는 오늘날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허균의 직선적인 성격과 자유분방한 기질이 다른 관료들의 반발을 사고, 그의 학문과 사상이 당시의 주류 흐름인 성리학과 많은 차이를 보였던 것이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설공찬전’이 ‘홍길동전’보다 100년 앞서 나온 한글소설이라는데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고 전제하면 저작 시기는 허균이 사망한 1618년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홍길동전’이 세상에 나온 시기보다 100년가량 앞서 한글로 기록된 소설이 20여 년 전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1996년 성주이씨 가문이 소장한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를 탈초(초서로 쓴 한자를 정자로 바꾸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제3책(1545~1546년의 일기)의 이면에서 발견된, 한글로 된 13장 분량의 ‘설공찬전’이 그것이다. ‘설공찬전’의 원본은 중종 때 문인 채수(1449~1515)가 쓴 한문소설이다.

전반부만 발견된 ‘설공찬전’ 한글본은 전북 순창 설씨 가문의 촉망받는 수재였지만 20대에 요절한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해 저승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당시 조정이 설공찬전을 혹세무민하는 소설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원본은 모두 불태워지고 채수는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비난 끝에 파직되는 필화 사건을 몰고 왔다.

한글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1511년)에 등장한다. 9월 2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문자(文字·한문)로 옮기거나 언어(諺語·한글)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관청에서 문서를 발송하여 조회)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9월 5일자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설공찬전‘을 불살랐다. 숨기고 내어 놓지 않는 자는, 요서 은장률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

이로 미루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한문 원본은 소설의 존재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1511년 또는 그 이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둘째는 조선왕조실록에 유일하게 기록된 국내소설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민중에 인기가 높아 한글 번역본까지 나와 널리 읽혀졌다는 점이다. 이는 1511년 이전에 한글소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명확한 근거다. 넷째는 발견되는 대로 불태워졌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그 시기에 이미 한글이 급속하게 퍼졌다는 점이다.

민가에서 몰래 보관되다가 1996년 한글 필사본이 발견되자 이후 설공찬전을 둘러싼 최초의 한글소설 논란이 제기되었다. 즉 ‘설공찬전’은 순수 한글본이 아니라 한글 번역본이니 이것을 순수 ‘홍길동전’처럼 한글소설로 봐야 하느냐는 논쟁이었다. 그럼에도 원본이 비록 한문본이지만 한글로 수용된 최초의 소설로서 본격적인 한글소설을 등장하게 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받고 있다. 한글이 창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글 번역본이 출현했다는 사실도 한국 문학사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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