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허균과 홍길동전 2-①] 허균이 ‘홍길동전’ 한문소설의 저자일 수는 있으나 한글소설의 저자는 아니고 더구나 ‘홍길동전’이 최초 한글소설도 아니라는데

↑ 국내 첫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인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1967년)

 

by 김지지

 

‘홍길동전’은 이런 소설

‘홍길동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만화와 영화로 수없이 제작되고 중고교에서도 ‘홍길동전’을 가르친다. 우리가 배운 바에 따르면, ‘홍길동전’은 양반가에서 서얼(첩의 자식)로 태어난 홍길동의 일대기를 그린 우리나라 최초 한글소설이고 저자는 허균이다. 참고로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서자는 양민인 첩의 자식이고 얼자는 천민인 첩의 자식이다. 홍길동의 모친은 천민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홍길동을 얼자라고 해야 하나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얼로 통일한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허균(1569~1618)은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 학자이자 문신이다. 아버지는 강릉 초당두부를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진 허엽, 첫째 형은 이름난 문장가이자 임진왜란 직전 김성일·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갔다 왔던 허성, 누나는 여성 문인으로 유명한 허난설헌이다. 허균에 대해서는 이 글 2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탐관오리를 물리쳐 고통받는 민초들에게 대리만족과 통쾌함을 선물주고 꿈과 희망을 안겨준 의적이다. 연구자들은 ‘홍길동전’이 그토록 오랫동안 민중의 사랑을 받은 이유를 신분제 모순 비판, 적서차별 철폐, 탐관오리 응징, 봉건 체제 비판, 해외 이상국(율도국) 건설 등을 활극풍의 서사로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소설 속 홍길동과 달리 조선왕조실록에 수차례 등장하는 홍길동이라는 실존 인물도 있다. 소설 속 홍길동(洪吉童)과 실존 인물 홍길동(洪吉同)은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모두 갖고 있다. 도적이고 관리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일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서얼(추정)로 태어났다는 것은 유사하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실존 인물 홍길동이 의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홍길동은 1500년(연산군 6년) 체포되었는데 13년 뒤 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이후 유망(流亡·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회복되지 못해 세금을 거두기 어렵다.” 홍길동의 도적질로 관아나 부자뿐 아니라 일반 백성의 피해 역시 무척 컸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로 미루어 우리가 아는 ‘홍길동’ 즉 ‘도술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정의로운 캐릭터’의 홍길동은 조선 후기의 한글소설 속 묘사에 기초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 아니라는 근거는

최근 ‘홍길동전’의 저자는 허균이 아니고 최초 한글소설도 아니라는 주장이 전문학자들 사이에 제기되면서 관련학계는 물론 일반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홍길동전’을 40년간 연구해온 전문학자가 구체적인 논거를 들어가며 제기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다. 최근 이 문제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 학자는 이윤석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다. 그는 2018년 발간한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한뼘책방)에서 자신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혔다. 주요 내용은 ‘홍길동전’은 ▲1800년 무렵 이름 없는 어느 평민 작가가 썼고 ▲최초의 한글소설도 아니며 ▲적서차별 타파와 사회 개혁을 다룬 작품이 아니고 서민의 소박한 신분 상승 소망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홍길동전’은 한글소설의 발전 단계상 도저히 허균 시절인 16~17세기에 나올 수 없다. 한글소설은 초기에는 중국 소설을 수입·번역한 형태로 나왔다가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새로운 형식의 한글소설이 창작되는데 분량이 짧고 주인공의 입신출세 이야기가 들어 있으며, 전쟁 이야기가 포함된 군담(軍談)이 들어간다. 이렇게 나온 작품들이 ‘소대성전’ ‘조웅전’ ‘유충렬전’ 같은 소설인데, ‘홍길동전’ 역시 이 유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윤석 교수의 저서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홍길동전’이 숙종(재위 1674~1720) 이후의 소설이라는 단서가 이미 소설 안에 있다는 점이다. 단서는 황석영의 소설로 유명한 ‘장길산’이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이 장길산을 ‘옛날 사람’으로 지칭하는데 장길산은 1692년(숙종 18년) 이후에야 실록에 등장한다. 이를 근거로 한글 ‘홍길동전’이 나온 시기가 최소한 1692년 이후라는 것이다. 그런데 ‘홍길동전’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생몰연도는 1569년~1618년이다. 허균이 저자라면 시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하나 사실은 허균의 문집 어디에도 ‘홍길동전’을 썼다는 기록이 없고, 허균이 저자라는 사실을 언급한 책도 없다는 것이다. 호러스 알렌의 ‘Korean tales’(1889년)와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1894년)에서도 ‘홍길동전’을 소개했으나 저자는 밝히지 않고 있다. 최남선이 문고본 소설로 1913년 발간한 ‘육전소설’ 중 하나인 ‘홍길동전’에도 허균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허균 창작설’은 누가 처음 제기했나

그렇다면 허균이 저자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인물은 누구일까. 1927년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다. 그가 제시한 ‘허균 창적설’의 근거는 하나다. 조선 중기 문신인 이식(1584∼1647) 사후에 발간된 이식의 시문집 ‘택당집’(1674년)에 관련 내용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 택당집은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도적이 된 사람들은 중국의 ‘수호전’을 좋아하는데, 허균·박엽 등도 그 책을 좋아해서 그 도적의 우두머리로 각각 호(號)를 삼아 서로 즐거워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수호전’을 모방한 것”이라는 대목이다.

택당집

 

문제는 ‘택당집’ 어디에도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글로 쓰여진 작품이라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택당집에 소개된 ‘홍길동전’은 한문으로 쓴 소설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이윤석 교수 주장이다. 물론 허균이 썼다는 ‘홍길동전’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택당집’의 기록이 저자인 이식이 죽고 난 후 송시열이 교정·편찬한 것이고 허균이 처형될 때 죄목에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다카하시 도루의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는 학설은 그의 조선인 제자들에 의해 ‘허균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썼다’는 설로 발전했는데 대표적인 제자가 훗날 남로당 간부가 된 국문학자 김태준이다. 그는 1933년 ‘조선소설사’에서 ‘홍길동전’이 계급 타파와 적서 차별 폐지, 빈민 구제, 새 사회(율도국) 건설 등을 내세운 ‘사회 혁명적 소설’이었다고 해석했다. 이 해석에 대해 이윤석 교수는 반역죄로 사형당한 허균이 세상을 뒤집는 책을 썼다고 믿고 싶고, 한글소설의 등장 시기가 앞당겨진다는 ‘애국적’ 연구 태도가 한몫해 역사를 보고 싶은 대로 본 결과라고 설명한다.

다카하시 도루

 

‘홍길동전’이 최초 한글소설이란 평가는 1948년 출간된 이명선의 ‘조선문학사’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명선의 기술이 어떤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광해조에 이르러 허균의 홍길동전이 나와, 이것이 조선말로 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한다’는 전언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홍길동전’을 둘러싸고 저자, 한글소설, 주제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홍길동전’은 천대받던 한글로 적서차별의 문제를 꼬집은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민의 정서와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후대 소설 창작에 큰 영향을 주고, 서민들에게 널리 읽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후대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도 ‘홍길동전’에 내려진 호평가다.

‘홍길동전’ 이본(異本)의 하나

 

‘홍길동전’ 한문본과 한글본의 관계는

허균이 한문으로 쓴 ‘홍길동전’과 한글 ‘홍길동전’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관련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 문인 황일호(1588~1641)가 쓴 ‘지소선생문집’에 실려있는 ‘노혁전(盧革傳)’이 그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명망가 출신이지만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은 사람은 죽이지 않고 재물만 빼앗는 도적이 됐는데, 관아에 잡히지 않고 40년 동안 도적을 이끌다 깨달은 바가 있어 무리를 해산시키고 착해져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이다. 서얼 출신, 의적, 신출귀몰, 도적을 그만둔 뒤 천수를 누리는 해피엔딩 같은 점에서 한글소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소선생문집’에 따르면, 황일호가 이 이야기를 전라감사 종사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시점은 1626년(인조 4년)이다. 그런데 허균이 사망한 해는 1618년(광해군 10년)이다. 이는 황일호가 ‘노혁전’ 속의 홍길동 스토리를 들은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8년 전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는 얘기가 된다. 위에 소개한 대로 이식의 시문집 ‘택당집’(1674년)에 분명히 기록된 ‘허균이 홍길동전 작자’라는 사실이 맞다면 이런 정리가 가능해진다. 허균의 한문소설 ‘홍길동전’(1618년 이전) → ‘노혁전’(1626년 이후) → 한글소설 ‘홍길동전’(1692년 이후)이다.

붉은색 선 안이 제목인 ‘노혁전’이다. 푸른색 선 안은 ‘성은 홍(洪)이고, 그 이름은 길동(吉同)’이라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2022년 원로 한국사학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허균 평전’을 출간했다. 그에 따르면 계급 타파, 적서 차별의 폐지, 빈민 구제, 새로운 사회의 건설 등에 관심이 많았던 허균의 삶이 홍길동의 삶과 너무 닮았다. 또한 ‘허균이 유구국(오키나와) 군사를 끌어들여 섬에 숨겨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홍길동전’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무리를 이끌고 떠나 율도국을 세우는 곳도 오키나와였다는 점에서 이 또한 닮은 점이라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정리 하면 이렇다. ▲현재 전해지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허균의 작품으로 보기는 무리다. ▲그러나 허균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아마도 한문으로 썼을) ‘홍길동전’을 썼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현전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원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은 실제 인물 홍길동이 아니라, 바로 허균 자신이었을 것이다.

 

‘설공찬전’이 최초 한글소설이라는 근거는

위에서 ‘홍길동전’ 한글소설의 저자가 허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그래도 기존의 학설대로 허균이 ‘홍길동전’ 한글소설의 저자라고 전제하면 저작 시기는 허균이 사망한 1618년 이전이다. 그런데 이보다 100년가량 앞서 한글로 기록된 소설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1996년 성주이씨 가문이 소장한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를 탈초(초서로 쓴 한자를 정자로 바꾸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제3책(1545~1546년의 일기)의 이면에서 발견된, 한글로 된 13장 분량의 ‘설공찬전(薛公瓚傳)’이 그것이다.

설공찬전

 

‘설공찬전’의 원본은 중종 때 문인 채수(1449~1515)가 쓴 한문소설이다. 전반부만 발견된 ‘설공찬전’ 한글본은 전북 순창 설씨 가문의 촉망받는 수재였지만 20대에 요절한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해 저승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당시 조정은 설공찬전을 혹세무민하는 소설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원본은 모두 불태워지고 채수는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비난 끝에 파직되는 필화 사건을 몰고 왔다.

그런데 불태워진 ‘설공찬전’의 원본이 사실은 한글소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근거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1511년)에 등장한다. 9월 2일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문자(文字·한문)로 옮기거나 언어(諺語·한글)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관청에서 문서를 발송하여 조회)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9월 5일자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설공찬전‘을 불살랐다. 숨기고 내어 놓지 않는 자는, 요서 은장률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

이로 미루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한문 원본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1511년 또는 그 이전에 지어졌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에 유일하게 기록된 국내소설이다. 셋째, 민중에 인기가 높아 한글 번역본까지 나와 널리 읽혀졌다. 이는 1511년 이전에 한글소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명확한 근거다. 넷째, 발견되는 대로 불태워졌다. 다섯째, 그 시기에 이미 한글이 급속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민가에서 몰래 보관되다가 1996년 한글 필사본이 발견되자 이후 ‘설공찬전’을 둘러싼 최초의 한글소설 논란이 제기되었다. 즉 ‘설공찬전’은 순수 한글본이 아니라 한글 번역본이니 이것을 순수 ‘홍길동전’처럼 한글소설로 봐야 하느냐는 논쟁이었다. 그럼에도 원본이 비록 한문본이지만 한글로 수용된 최초의 소설로서 본격적인 한글소설을 등장하게 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한글이 창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글 번역본이 출현했다는 사실도 한국 문학사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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